
윌리엄 블레이크는 평생 환영을 보았다. 그가 본 것은 세상이 '환각'이라 부르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진짜 현실이었다. 그는 이성이 제시하는 세계를 믿지 않았고, 종교가 약속하는 구원을 따르지 않았으며, 도덕이 규정하는 선악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상상력을 믿었다. 상상력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상상력만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있어야 할 모습으로 볼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그의 문장은 시가 아니라 비전이었다. 세상이 그를 광인이라 불렀을 때도, 그는 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한 줄 한 줄이 그에게는 다른 세계를 여는 문이었고,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증명이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시인’이기 이전에 위험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이성과 종교, 도덕과 합리를
동시에 의심했고,
인간의 구원은 오직 상상력(Imagination) 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혼자 읽으면 거의 반드시 오해됩니다.
상징은 난해하고, 신화는 파편적이며,
텍스트는 독자를 시험합니다.
이런 분에게 권합니다
블레이크를 읽다 포기한 경험이 있는 분
문학·철학·종교의 경계에 관심 있는 분
사고의 틀을 흔들고 싶은 분
이 과정은
윌리엄 블레이크를
문체학자 라성일의 시선으로 읽습니다.
블레이크 그 사람 Blake the Man
만일 우리가 모든 평범한 인간의 삶을 예리하게 보고 느낄 수 있다면 풀잎이 자라는 소리와 다람쥐의 심장 박동을 듣는 것과 같을테고, 그러면 우리는 정적의 건너편에서 포효하는 소리에 놀라 죽고 말 것이다.
—조지 엘리어트의 『미들마치』2부 ‘노인과 청년’에서
그분은 작은 갓난아기 되시네. 그분은 비탄의 인물 되시고 그분은 슬픔도 함께 느끼시네. . . . 그분 우리 곁에 앉아 신음하시네.
—윌리엄 블레이크 “타인의 슬픔에 관해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항상 ‘상상력의 시인 (Poet in Imagination)’이었다. 그에 관해 말할 때면, 거듭 반복되고 누차 강조되는 단어가 바로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4살 무렵 하나님의 얼굴을 목격하는 환영 체험에서, 8살 즈음 런던 남부의 시골길을 걷다 우연히 성난 노인의 모습으로 변신한 엉겅퀴꽃과 말다툼을 했던 일화에서, 그리고 무명과 가난과 오욕으로 얼룩진 삶의 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신화 세계를 구상하고 집필하며 결국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인정받기까지, 평생 지속되었던 한 인간의 예술적 의지와 종교적 황홀은 분명 상상력의 몫이었을 것이다. 어느 천사가 이 어린 시인에게 전했다는 말. 상상력은 존재의 지극한 기쁨 (bliss)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1807년 50세에 접어든 그가, 동이 트도록 잠 못 이루던 온통 푸르렀던 밤에, 자신의 일기장에 적은 문장 한 점은 오히려 상상력으로 신음하는 존재의 고통을 냉정하게 폭로한다. “1807년 새벽 2시에서 7시, 온통 절망 뿐”—블레이크에게 상상력은 단순히 영적 체험의 능력 혹은 시적 재능의 표현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상상력은 고통에 민감해지며 고통을 환기하는 능력에 가까웠다. 주인에게 학대받는 고양이, 추운 겨울 굴뚝 청소를 하는 어린 소년, 밤새 눈물로 밤을 지새는 항구의 임신한 매춘부처럼, 시인의 상상력은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병약함을 목격하는 고독한 근심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예술가로서의 소명은 역사에 무자비하게 침입하는 고통의 압력을 의미있는 사회적 가치와 목표로 전환시키는데 있었다.
블레이크의 상상력은 고통을 상쇄하거나 초극하는 정신의 능력이나 상징이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상상력은 고통을 불러내고 데려오는 능력, 다시 말해 타인의 삶과 감각 속으로 깊이 침투하여 그 고통을 생생하게 체감하는 공감의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조지 엘리어트의 『미들마치』의 문장처럼, 블레이크에게 “풀이 자라는 소리를 듣는 능력”은 시적 은유도, 종교적 황홀의 수사도 아니다. 그것은 사물과 생명이 지닌 고유한 목소리, 신음하고 절규하는 고통의 환청을 문자 그대로 들을 수 있는 감각적 태도이자, 동시에 모든 존재의 슬픔과 고통에 순진하게 노출되는 위험한 상태를 의미한다. 펄럭이는 삶과 흩어지는 인상과 미세한 진동에 감각을 열어두는 행위는 정신의 축복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의 고통 속으로 스스로 내던져지는 일종의 “부정의 능력(negative capability)”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상력이란 세계의 고통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게 만드는 윤리적·존재론적 고유한 감각, 즉 부정의 능력이다.
강좌 『블레이크 그 사람』은 천재 시인이라는 그 익숙한 수식어에 감춰진 역사적 인간 윌리암 블레이크와 그의 독자적인 상상력 개념을 신비주의적 계시나 낭만주의적 천재로 단순화하지 않고, 한 시인의 인생과 예술 작품을 통해 인간은 과연 많은 고통을 이해하고 감내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질문한다. 런던 외곽의 황폐한 노천에서 빈한한 삶을 이어갔던 시인의 삶을 따라가며 우리는 상상력이 주는 그 흔한 위안이 아니라, 상상력이 요구하는 윤리적 책임과 존재의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곤란한 세계 속에서 오직 자신만을 확신하고 소비하는 대신, 타자라는 세상을 상실하지 않고 온전히 지켜내는 지혜의 근심을 배울 것이다. 타자의 세상이란 시인이 말한대로, 화난 엉겅퀴꽃과 비틀린 떡갈나무의 세계이며, 온순한 어린양과 분노한 호랑이의 세계이며, 절망어린 천국과 책을 짓는 지옥이니, 이 지상에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을 더욱 사랑하고, 우리가 혐오해야 할 것을 더욱 혐오하도록 하자.





윌리엄 블레이크는 평생 환영을 보았다. 그가 본 것은 세상이 '환각'이라 부르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진짜 현실이었다. 그는 이성이 제시하는 세계를 믿지 않았고, 종교가 약속하는 구원을 따르지 않았으며, 도덕이 규정하는 선악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상상력을 믿었다. 상상력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상상력만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있어야 할 모습으로 볼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그의 문장은 시가 아니라 비전이었다. 세상이 그를 광인이라 불렀을 때도, 그는 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한 줄 한 줄이 그에게는 다른 세계를 여는 문이었고,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증명이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시인’이기 이전에 위험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이성과 종교, 도덕과 합리를
동시에 의심했고,
인간의 구원은 오직 상상력(Imagination) 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혼자 읽으면 거의 반드시 오해됩니다.
상징은 난해하고, 신화는 파편적이며,
텍스트는 독자를 시험합니다.
이런 분에게 권합니다
블레이크를 읽다 포기한 경험이 있는 분
문학·철학·종교의 경계에 관심 있는 분
사고의 틀을 흔들고 싶은 분
이 과정은
윌리엄 블레이크를
문체학자 라성일의 시선으로 읽습니다.
블레이크 그 사람 Blake the Man
만일 우리가 모든 평범한 인간의 삶을 예리하게 보고 느낄 수 있다면 풀잎이 자라는 소리와 다람쥐의 심장 박동을 듣는 것과 같을테고, 그러면 우리는 정적의 건너편에서 포효하는 소리에 놀라 죽고 말 것이다.
—조지 엘리어트의 『미들마치』2부 ‘노인과 청년’에서
그분은 작은 갓난아기 되시네. 그분은 비탄의 인물 되시고 그분은 슬픔도 함께 느끼시네. . . . 그분 우리 곁에 앉아 신음하시네.
—윌리엄 블레이크 “타인의 슬픔에 관해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항상 ‘상상력의 시인 (Poet in Imagination)’이었다. 그에 관해 말할 때면, 거듭 반복되고 누차 강조되는 단어가 바로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4살 무렵 하나님의 얼굴을 목격하는 환영 체험에서, 8살 즈음 런던 남부의 시골길을 걷다 우연히 성난 노인의 모습으로 변신한 엉겅퀴꽃과 말다툼을 했던 일화에서, 그리고 무명과 가난과 오욕으로 얼룩진 삶의 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신화 세계를 구상하고 집필하며 결국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인정받기까지, 평생 지속되었던 한 인간의 예술적 의지와 종교적 황홀은 분명 상상력의 몫이었을 것이다. 어느 천사가 이 어린 시인에게 전했다는 말. 상상력은 존재의 지극한 기쁨 (bliss)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1807년 50세에 접어든 그가, 동이 트도록 잠 못 이루던 온통 푸르렀던 밤에, 자신의 일기장에 적은 문장 한 점은 오히려 상상력으로 신음하는 존재의 고통을 냉정하게 폭로한다. “1807년 새벽 2시에서 7시, 온통 절망 뿐”—블레이크에게 상상력은 단순히 영적 체험의 능력 혹은 시적 재능의 표현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상상력은 고통에 민감해지며 고통을 환기하는 능력에 가까웠다. 주인에게 학대받는 고양이, 추운 겨울 굴뚝 청소를 하는 어린 소년, 밤새 눈물로 밤을 지새는 항구의 임신한 매춘부처럼, 시인의 상상력은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병약함을 목격하는 고독한 근심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예술가로서의 소명은 역사에 무자비하게 침입하는 고통의 압력을 의미있는 사회적 가치와 목표로 전환시키는데 있었다.
블레이크의 상상력은 고통을 상쇄하거나 초극하는 정신의 능력이나 상징이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상상력은 고통을 불러내고 데려오는 능력, 다시 말해 타인의 삶과 감각 속으로 깊이 침투하여 그 고통을 생생하게 체감하는 공감의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조지 엘리어트의 『미들마치』의 문장처럼, 블레이크에게 “풀이 자라는 소리를 듣는 능력”은 시적 은유도, 종교적 황홀의 수사도 아니다. 그것은 사물과 생명이 지닌 고유한 목소리, 신음하고 절규하는 고통의 환청을 문자 그대로 들을 수 있는 감각적 태도이자, 동시에 모든 존재의 슬픔과 고통에 순진하게 노출되는 위험한 상태를 의미한다. 펄럭이는 삶과 흩어지는 인상과 미세한 진동에 감각을 열어두는 행위는 정신의 축복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의 고통 속으로 스스로 내던져지는 일종의 “부정의 능력(negative capability)”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상력이란 세계의 고통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게 만드는 윤리적·존재론적 고유한 감각, 즉 부정의 능력이다.
강좌 『블레이크 그 사람』은 천재 시인이라는 그 익숙한 수식어에 감춰진 역사적 인간 윌리암 블레이크와 그의 독자적인 상상력 개념을 신비주의적 계시나 낭만주의적 천재로 단순화하지 않고, 한 시인의 인생과 예술 작품을 통해 인간은 과연 많은 고통을 이해하고 감내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질문한다. 런던 외곽의 황폐한 노천에서 빈한한 삶을 이어갔던 시인의 삶을 따라가며 우리는 상상력이 주는 그 흔한 위안이 아니라, 상상력이 요구하는 윤리적 책임과 존재의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곤란한 세계 속에서 오직 자신만을 확신하고 소비하는 대신, 타자라는 세상을 상실하지 않고 온전히 지켜내는 지혜의 근심을 배울 것이다. 타자의 세상이란 시인이 말한대로, 화난 엉겅퀴꽃과 비틀린 떡갈나무의 세계이며, 온순한 어린양과 분노한 호랑이의 세계이며, 절망어린 천국과 책을 짓는 지옥이니, 이 지상에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을 더욱 사랑하고, 우리가 혐오해야 할 것을 더욱 혐오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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