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is the Man
문체는 인간이다

사무엘 존슨
내가 이토록 휼륭한 분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니!

스스로를 “고통받는 영혼”이라 불렀던 제임스 보즈웰은 1763년 5월 16일, 한 지인의 서점에서 평생 잊지못할 만남을 경험한다. 말을 심하게 더듬고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분이 오셨습니다. 왕자님!”이라는 친구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럽 최고의 지성이 그의 눈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사무엘 존슨이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어색했지만 끝내 즐거웠던 이 우연한 만남은 보즈웰의 일기장에 그대로 기록되었다. “확실히 나는 운이 너무 좋았다. 이토록 훌륭한 분과 친분을 쌓게 되었으니!”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출신의 보즈웰은 평생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이 악마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탈출구는 존슨과 나누었던 다정한 대화였다고 자주 고백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고타마 싯다르타와 아난다의 애정에 비견될 만큼 각별했을 것이다. 그러나 존슨 역시 혼자 있는 시간에는 후회와 자책이라는 어두운 망령에 사로잡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들이 잦았다. 그 또한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존슨은 이 고통의 원인을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 돌렸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위대한 로마 시인들의 숭고한 문장을 암송하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럼에도 말년의 그는 결국 깊은 아편 중독에 빠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 존슨은18세기 후반 영문학의 기준을 정립한 탁월한 시인이자 비평가였다. 파우스트적 열정과 박학에 기대어,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영어 사전을 집필한 정신의 거인이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자연스레 “존슨 박사(Dr. Johnson)”로 불리게 된다.
사전 집필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그의 성격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존슨은 영어 사전을 집필하던 중 “귀리(oats)”를 이렇게 정의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주로 말에게 주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이 먹는 곡식.” 이에 격분한 보즈웰의 친구 로드 앨리뱅크는 재치 있게 받아친다. “아, 그래서 잉글랜드에는 좋은 말이 많고, 스코틀랜드에는 좋은 사람이 그렇게 많군요.” 보즈웰을 통해서 이 말을 전해 들은 존슨은 박장대소하며 한없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토록 유쾌한 말벗이 또 어디 있었을까.
보즈웰은 생전에 자신이 목격한 스승의 지적인 대화, 다정한 태도, 고집스러운 편견, 심지어 고약한 취미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자책과 후회로 가려진 한 인간의 불굴의 정신, 그리고 영혼의 내적 투쟁을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그 결실이 바로 1791년에 출간된 『사무엘 존슨의 생애(The Life of Samuel Johnson)』이다. 이 작품은 전기 문학사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공적인 위인이 아니라, 사적인 인간과 마주한다. 사소한 말투와 표정, 분노와 후회를 반복하는 위대하고 사소한 어느 인간의 초상을 말이다. 독자는 어느새 사무엘 존슨과 한 방에 앉아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Jesus wept.
예수께서 눈물 흘리셨다.

1773년 가을, 사무엘 존슨은 제임스 보즈웰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났고, 그 여정 중 잠시 보즈웰의 시골 저택에 머문 적이 있다. 그곳에서 존슨의 시선을 끈 것은, 마치 예의 바른 선물처럼 방 한켠에 조용히 놓여 있던 신약성서 한 권이었다. 그는 별다른 의도 없이 그 성서를 집어 들었고,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한 구절에 이르러 뜻밖의 격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순간 그의 내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혼란이 일었고, 그것은 이내 미묘한 통증으로까지 번져갔다.
이후 존슨은 이 성서의 한 대목을 읽을 때마다 반복해서 고통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 문장은 요한복음 11장 35절, “Jesus wept—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라는 구절로,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짧은 문장이었다.
이 구절이 등장하는 놓인 맥락을 간단히 소개한다. 예수가 평소 아끼던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에게는 오빠 나사로가 있었다. 그는 한때 문둥병자로 살아가며 사회적 냉대와 고립을 감내해야 했으나, 병에서 회복된 뒤에도 다시 깊은 병에 시달리다 결국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성서가 “예수께서 사랑하셨다”고 굳이 밝혀 기록할 만큼 선한 사람이었던 나사로는, 자신을 만나러 길을 떠난 예수를 끝내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만다.
마르다는 예수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오빠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 원망하고, 주변 사람들은 이미 사흘이 지났다는 사실을 되뇌며 체념 섞인 웅성거림을 이어간다. 그들은 예수를 나사로의 무덤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 무덤 앞에서, 예수는 눈물을 흘린다. 성서의 저자는 이 이례적인 순간—기적을 행하는 메시아가 타인의 죽음 앞에서 흘린 눈물—을 단 한 문장으로, 그러나 결코 빠뜨리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
존슨의 문체
모방할 수 있지만 늘 인정받을 수는 없다.
사무엘 존슨은 글을 탁월하게 잘 썼다. 18세기 후반 영문학의 한 시기가 아예 “사무엘 존슨의 시대(The Age of Samuel Johnson)”라 불릴 정도로, 글쓰기는 그의 수많은 재능 가운데서도 단연 가장 빛나는 영역이었다. 특히 그가 유행시킨 정교하고 세련된 영어 문체는 그의 이름을 따서 존슨체(Johnsonese)라 불렸는데, 이는 로마의 위대한 웅변가 키케로의 라틴어 문장을 영어의 문법과 리듬으로 변용하고, 그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지상의 행복과 도덕적 미덕을 동시에 심어주겠다는 존슨 특유의 결심에서 빚어진 문체였다. 비록 그 문장은 복잡하고 때로는 난해하지만, 치밀한 논리와 미학적 균형을 갖춘 문장 구조로 당대 독자들을 압도했다.
이처럼 화려하고 정교한 존슨의 문장을 오랫동안 접해온 제임스 보즈웰은, “Jesus wept”라는 지나치게 평범한 영어 문장 앞에서 실망한 기색을 가장한다. 동시에 그는 스승의 취향에 부응하고 자신의 문장력을 시험해보고자, 이 짧은 구절을 조심스럽게 고쳐 읽는다. “Jesus, the Saviour of the world, overcome with grief, burst into a flood of tears.”
이 장면에서 우리는 잠시, 존슨의 느긋한 칭찬을 기대하며 은근히 의기양양해졌을 보즈웰의 얼굴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맞닥뜨린 반응은 찬사가 아닌, 존슨의 차가운 조롱과 매서운 분노였다. 도대체 왜 사무엘 존슨은, 자신을 누구보다 더 열심히 모방하고 연습한 제자에게 그토록 냉정하게 굴었을까?
Periodic Sentence
지적 사유와 분석이 빚어내는 문장의 제왕
보즈웰이 개작한 문장은 흔히 “도미문(periodic sentence)”이라 불리는 고전적 문장 형식에 속한다. 참고로 『에쎄(Essais)』의 저자 몽테뉴는 이 문장 형식을 열렬히 숭배하면서도 동시에 극도로 혐오한 인물로 유명하다. 도미문이란 문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의미가 완결되는, 고전 수사학의 전통을 대표하는 문장 유형이다.
보즈웰의 개작문에서도 문장의 결정적 사건은 종결부에 배치된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에 해당하는 a flood of tears에서 비로소 사건의 핵심 행위가 제시되며, 그 순간 문장의 의미는 완결된다. 그에 앞서 주어부에 놓인 Jesus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속되는 수식어들을 배치한다. 이때 중요한 원칙은 동일한 문법 구조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the Saviour of the world는 명사구로, overcome with grief는 형용사구로 구성되어 형식적 변주를 이루며, 단조로움을 피한다.
이 수식어들은 또한 서술의 추상 수준 (levels of abstraction)을 점진적으로 용해시킨다. “세상의 구원자”라는 고도의 추상 개념에서 출발해, “슬픔에 압도된 존재”라는 구체적인 경험의 차원으로 의미가 이동한다. 이렇게 문장은 독자를 관념에서 경험으로 이끈다.
문장의 의미가 최종적으로 완결되기 위해서는 동사를 중심으로 의미적·논리적 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burst into라는 동사를 기준으로, 앞에는 비통한 감정을 나타내는 grief가, 뒤에는 그 감정의 표출인 tears가 배치되어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더 나아가 어원을 살펴보면, 로망스어 계통의 고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grief와 게르만어 계통의 고대 영어에서 비롯된 tears가 대비를 이루는데, 이러한 어휘 선택은 문장의 극적 효과를 한층 강화한다. 특히 단음절의 토착어 tears로 문장을 마무리함으로써, 문장은 강렬하고 즉각적인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처럼 도미문은 인간의 경험을 지적 사유와 분석으로 관통하려는 전통, 다시 말해 지적 설계로서의 문장이 지닌 권위와 유산을 대변한다. 보즈웰은 바로 이 고색창연한 문장의 전통, 곧 사무엘 존슨이 거주하고 있던 그 권위 있는 문체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었던 것이다.
어디서나 들려오는 슬픈 진실
더딘 출세는 의미있으나, 가난으로 암울할지니

사무엘 존슨이 더없이 흠모했던 시인은 단연 알렉산더 포프 (Alexander Pope)였다. 존슨 자신의 말에 따르면, 포프는 “사실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하고, 자신의 능력보다 더 많이 노력하는 천재”였다. 그가 보기에 포프의 천재성은 찬사와 비방을 똑같이 견뎌내는 정신의 견고함, 다시 말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음악과 소음을 침묵으로 통과시키는 힘에 있었다.
그러나 존슨은 천재를 숭배하면서도 끝내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리라 직감했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번뜩이는 창조의 불꽃이 아니라, 학자의 박학다식에 가까웠다. 그는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처럼 위대한 시인이 되리라 결심했지만, 그 결심의 이면에는 언제나 가혹한 가난과 고달픈 역경 속에서 자신의 인생이 허비될거라는 불안이 짙게 배어있었다.
천상의 아들을 꿈꾸면서도 결국 지상의 딸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존슨은 그 잔인한 진실과 평생을 힘겹게 싸워야만 했다. 그렇게 낡고 침울한 자기 전망 속에서,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예수가 우셨다”라는 문장과 마주한다. 성서의 한 페이지 위에서 짧게 숨을 고르듯 놓인 그 문장은, 신음과 절규를 억지로 봉합한 고통어린 비명이었다. 예수의 눈물이 흐르는 그 희미한 소리에도 사무엘 존슨의 고막은 터질듯한 통증을 체감한다. 그 낯선 고통은,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로도 그의 사유 속에서 몇 차례나 되살아나며 되풀이 되었다.
Humble Gait
덜 말하지만, 더 아픈 문장이 있다.
사무엘 존슨은 “언어는 사유의 장식이다(Language is the dress of thought)”라는 신념을 평생 확고히 지켜온 인물이다. 여기서 ‘장식’이란 단순한 미사여구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벌거벗은 사유가 공적인 공간에 나설 수 있도록, 사유에 가장 정확한 정의와 가장 적합한 형식을 부여하는 지적인 판단이자 윤리적 책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존슨의 문장은 언제나 복잡한 사유와 깊은 반성, 탁월한 미학과 기교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의 문장은 무겁지만 정직하고, 느리지만 기이하게도 쾌활하다.
그러나 “Jesus wept.—예수께서 우셨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존슨의 이론과 실천을 한순간에 무력화한다. 불과 두 단어로 이루어진 이 문장에는 수식도 설명도, 그가 말한 ‘장식’의 흔적조차 없다. 오직 두 단어뿐이다. 일 획, 일 점도 더하거나 덜어내지 못한다.
아마도 존슨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문장은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가오는가를 궁리하는 데서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문체란 사유를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깃든 거룩한 감정에 직접 접촉하는 감각의 방식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수가 우셨다”라는 문장은 설명을 거부한다. 판단 이전의 태도, 사유 이전의 연민, 해석 이전의 공감. 그 즉자성(immediacy) 속에서 우리는 문장이 간직한 가장 원초적인 충동과 마주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역설을 발견한다. 때로는 철저한 장식의 절제, 혹은 장식의 부재 그 자체가 가장 고결한 장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장에서 언어는 사유를 장식하지 않는다. 대신 벌거벗은 사유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없이 물러선다. 덜 말하지만, 그래서 더 가슴 아픈 문장이 있는 법이다
Style is the Man
문체는 인간이다

사무엘 존슨
내가 이토록 휼륭한 분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니!

스스로를 “고통받는 영혼”이라 불렀던 제임스 보즈웰은 1763년 5월 16일, 한 지인의 서점에서 평생 잊지못할 만남을 경험한다. 말을 심하게 더듬고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분이 오셨습니다. 왕자님!”이라는 친구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럽 최고의 지성이 그의 눈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사무엘 존슨이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어색했지만 끝내 즐거웠던 이 우연한 만남은 보즈웰의 일기장에 그대로 기록되었다. “확실히 나는 운이 너무 좋았다. 이토록 훌륭한 분과 친분을 쌓게 되었으니!”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출신의 보즈웰은 평생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이 악마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탈출구는 존슨과 나누었던 다정한 대화였다고 자주 고백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고타마 싯다르타와 아난다의 애정에 비견될 만큼 각별했을 것이다. 그러나 존슨 역시 혼자 있는 시간에는 후회와 자책이라는 어두운 망령에 사로잡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들이 잦았다. 그 또한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존슨은 이 고통의 원인을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 돌렸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위대한 로마 시인들의 숭고한 문장을 암송하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럼에도 말년의 그는 결국 깊은 아편 중독에 빠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 존슨은18세기 후반 영문학의 기준을 정립한 탁월한 시인이자 비평가였다. 파우스트적 열정과 박학에 기대어,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영어 사전을 집필한 정신의 거인이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자연스레 “존슨 박사(Dr. Johnson)”로 불리게 된다.
사전 집필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그의 성격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존슨은 영어 사전을 집필하던 중 “귀리(oats)”를 이렇게 정의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주로 말에게 주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이 먹는 곡식.” 이에 격분한 보즈웰의 친구 로드 앨리뱅크는 재치 있게 받아친다. “아, 그래서 잉글랜드에는 좋은 말이 많고, 스코틀랜드에는 좋은 사람이 그렇게 많군요.” 보즈웰을 통해서 이 말을 전해 들은 존슨은 박장대소하며 한없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토록 유쾌한 말벗이 또 어디 있었을까.
보즈웰은 생전에 자신이 목격한 스승의 지적인 대화, 다정한 태도, 고집스러운 편견, 심지어 고약한 취미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자책과 후회로 가려진 한 인간의 불굴의 정신, 그리고 영혼의 내적 투쟁을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그 결실이 바로 1791년에 출간된 『사무엘 존슨의 생애(The Life of Samuel Johnson)』이다. 이 작품은 전기 문학사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공적인 위인이 아니라, 사적인 인간과 마주한다. 사소한 말투와 표정, 분노와 후회를 반복하는 위대하고 사소한 어느 인간의 초상을 말이다. 독자는 어느새 사무엘 존슨과 한 방에 앉아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Jesus wept.
예수께서 눈물 흘리셨다.

1773년 가을, 사무엘 존슨은 제임스 보즈웰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났고, 그 여정 중 잠시 보즈웰의 시골 저택에 머문 적이 있다. 그곳에서 존슨의 시선을 끈 것은, 마치 예의 바른 선물처럼 방 한켠에 조용히 놓여 있던 신약성서 한 권이었다. 그는 별다른 의도 없이 그 성서를 집어 들었고,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한 구절에 이르러 뜻밖의 격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순간 그의 내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혼란이 일었고, 그것은 이내 미묘한 통증으로까지 번져갔다.
이후 존슨은 이 성서의 한 대목을 읽을 때마다 반복해서 고통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 문장은 요한복음 11장 35절, “Jesus wept—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라는 구절로,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짧은 문장이었다.
이 구절이 등장하는 놓인 맥락을 간단히 소개한다. 예수가 평소 아끼던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에게는 오빠 나사로가 있었다. 그는 한때 문둥병자로 살아가며 사회적 냉대와 고립을 감내해야 했으나, 병에서 회복된 뒤에도 다시 깊은 병에 시달리다 결국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성서가 “예수께서 사랑하셨다”고 굳이 밝혀 기록할 만큼 선한 사람이었던 나사로는, 자신을 만나러 길을 떠난 예수를 끝내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만다.
마르다는 예수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오빠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 원망하고, 주변 사람들은 이미 사흘이 지났다는 사실을 되뇌며 체념 섞인 웅성거림을 이어간다. 그들은 예수를 나사로의 무덤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 무덤 앞에서, 예수는 눈물을 흘린다. 성서의 저자는 이 이례적인 순간—기적을 행하는 메시아가 타인의 죽음 앞에서 흘린 눈물—을 단 한 문장으로, 그러나 결코 빠뜨리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
존슨의 문체
모방할 수 있지만 늘 인정받을 수는 없다.
사무엘 존슨은 글을 탁월하게 잘 썼다. 18세기 후반 영문학의 한 시기가 아예 “사무엘 존슨의 시대(The Age of Samuel Johnson)”라 불릴 정도로, 글쓰기는 그의 수많은 재능 가운데서도 단연 가장 빛나는 영역이었다. 특히 그가 유행시킨 정교하고 세련된 영어 문체는 그의 이름을 따서 존슨체(Johnsonese)라 불렸는데, 이는 로마의 위대한 웅변가 키케로의 라틴어 문장을 영어의 문법과 리듬으로 변용하고, 그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지상의 행복과 도덕적 미덕을 동시에 심어주겠다는 존슨 특유의 결심에서 빚어진 문체였다. 비록 그 문장은 복잡하고 때로는 난해하지만, 치밀한 논리와 미학적 균형을 갖춘 문장 구조로 당대 독자들을 압도했다.
이처럼 화려하고 정교한 존슨의 문장을 오랫동안 접해온 제임스 보즈웰은, “Jesus wept”라는 지나치게 평범한 영어 문장 앞에서 실망한 기색을 가장한다. 동시에 그는 스승의 취향에 부응하고 자신의 문장력을 시험해보고자, 이 짧은 구절을 조심스럽게 고쳐 읽는다. “Jesus, the Saviour of the world, overcome with grief, burst into a flood of tears.”
이 장면에서 우리는 잠시, 존슨의 느긋한 칭찬을 기대하며 은근히 의기양양해졌을 보즈웰의 얼굴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맞닥뜨린 반응은 찬사가 아닌, 존슨의 차가운 조롱과 매서운 분노였다. 도대체 왜 사무엘 존슨은, 자신을 누구보다 더 열심히 모방하고 연습한 제자에게 그토록 냉정하게 굴었을까?
Periodic Sentence
지적 사유와 분석이 빚어내는 문장의 제왕
보즈웰이 개작한 문장은 흔히 “도미문(periodic sentence)”이라 불리는 고전적 문장 형식에 속한다. 참고로 『에쎄(Essais)』의 저자 몽테뉴는 이 문장 형식을 열렬히 숭배하면서도 동시에 극도로 혐오한 인물로 유명하다. 도미문이란 문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의미가 완결되는, 고전 수사학의 전통을 대표하는 문장 유형이다.
보즈웰의 개작문에서도 문장의 결정적 사건은 종결부에 배치된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에 해당하는 a flood of tears에서 비로소 사건의 핵심 행위가 제시되며, 그 순간 문장의 의미는 완결된다. 그에 앞서 주어부에 놓인 Jesus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속되는 수식어들을 배치한다. 이때 중요한 원칙은 동일한 문법 구조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the Saviour of the world는 명사구로, overcome with grief는 형용사구로 구성되어 형식적 변주를 이루며, 단조로움을 피한다.
이 수식어들은 또한 서술의 추상 수준 (levels of abstraction)을 점진적으로 용해시킨다. “세상의 구원자”라는 고도의 추상 개념에서 출발해, “슬픔에 압도된 존재”라는 구체적인 경험의 차원으로 의미가 이동한다. 이렇게 문장은 독자를 관념에서 경험으로 이끈다.
문장의 의미가 최종적으로 완결되기 위해서는 동사를 중심으로 의미적·논리적 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burst into라는 동사를 기준으로, 앞에는 비통한 감정을 나타내는 grief가, 뒤에는 그 감정의 표출인 tears가 배치되어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더 나아가 어원을 살펴보면, 로망스어 계통의 고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grief와 게르만어 계통의 고대 영어에서 비롯된 tears가 대비를 이루는데, 이러한 어휘 선택은 문장의 극적 효과를 한층 강화한다. 특히 단음절의 토착어 tears로 문장을 마무리함으로써, 문장은 강렬하고 즉각적인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처럼 도미문은 인간의 경험을 지적 사유와 분석으로 관통하려는 전통, 다시 말해 지적 설계로서의 문장이 지닌 권위와 유산을 대변한다. 보즈웰은 바로 이 고색창연한 문장의 전통, 곧 사무엘 존슨이 거주하고 있던 그 권위 있는 문체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었던 것이다.
어디서나 들려오는 슬픈 진실
더딘 출세는 의미있으나, 가난으로 암울할지니

사무엘 존슨이 더없이 흠모했던 시인은 단연 알렉산더 포프 (Alexander Pope)였다. 존슨 자신의 말에 따르면, 포프는 “사실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하고, 자신의 능력보다 더 많이 노력하는 천재”였다. 그가 보기에 포프의 천재성은 찬사와 비방을 똑같이 견뎌내는 정신의 견고함, 다시 말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음악과 소음을 침묵으로 통과시키는 힘에 있었다.
그러나 존슨은 천재를 숭배하면서도 끝내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리라 직감했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번뜩이는 창조의 불꽃이 아니라, 학자의 박학다식에 가까웠다. 그는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처럼 위대한 시인이 되리라 결심했지만, 그 결심의 이면에는 언제나 가혹한 가난과 고달픈 역경 속에서 자신의 인생이 허비될거라는 불안이 짙게 배어있었다.
천상의 아들을 꿈꾸면서도 결국 지상의 딸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존슨은 그 잔인한 진실과 평생을 힘겹게 싸워야만 했다. 그렇게 낡고 침울한 자기 전망 속에서,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예수가 우셨다”라는 문장과 마주한다. 성서의 한 페이지 위에서 짧게 숨을 고르듯 놓인 그 문장은, 신음과 절규를 억지로 봉합한 고통어린 비명이었다. 예수의 눈물이 흐르는 그 희미한 소리에도 사무엘 존슨의 고막은 터질듯한 통증을 체감한다. 그 낯선 고통은,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로도 그의 사유 속에서 몇 차례나 되살아나며 되풀이 되었다.
Humble Gait
덜 말하지만, 더 아픈 문장이 있다.
사무엘 존슨은 “언어는 사유의 장식이다(Language is the dress of thought)”라는 신념을 평생 확고히 지켜온 인물이다. 여기서 ‘장식’이란 단순한 미사여구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벌거벗은 사유가 공적인 공간에 나설 수 있도록, 사유에 가장 정확한 정의와 가장 적합한 형식을 부여하는 지적인 판단이자 윤리적 책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존슨의 문장은 언제나 복잡한 사유와 깊은 반성, 탁월한 미학과 기교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의 문장은 무겁지만 정직하고, 느리지만 기이하게도 쾌활하다.
그러나 “Jesus wept.—예수께서 우셨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존슨의 이론과 실천을 한순간에 무력화한다. 불과 두 단어로 이루어진 이 문장에는 수식도 설명도, 그가 말한 ‘장식’의 흔적조차 없다. 오직 두 단어뿐이다. 일 획, 일 점도 더하거나 덜어내지 못한다.
아마도 존슨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문장은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가오는가를 궁리하는 데서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문체란 사유를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깃든 거룩한 감정에 직접 접촉하는 감각의 방식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수가 우셨다”라는 문장은 설명을 거부한다. 판단 이전의 태도, 사유 이전의 연민, 해석 이전의 공감. 그 즉자성(immediacy) 속에서 우리는 문장이 간직한 가장 원초적인 충동과 마주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역설을 발견한다. 때로는 철저한 장식의 절제, 혹은 장식의 부재 그 자체가 가장 고결한 장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장에서 언어는 사유를 장식하지 않는다. 대신 벌거벗은 사유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없이 물러선다. 덜 말하지만, 그래서 더 가슴 아픈 문장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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