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수업>
머리말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그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암묵적인 일관성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관성은 나를 정말로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묘하게 기쁜 동시에 묘하게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단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의 행동규범을 철저하게 재검토할 것을 강요당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약하고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생물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돈 후앙은 약하거나 무력한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단지 그와 함께 있기만 해도 그와 나의 행동방식 사이에 존재하는 우열을 뚜렷이 자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그가 내게 했던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우리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에 관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넨 자기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군.” 그는 이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그래서 그렇게 묘한 피로감에 시달리는 거야. 자네가 주위 세계를 차단하고 자기 논리에만 매달리는 건 바로 그 탓일세. 그래서 자네한테 남는 건 고민밖에는 없어. 나도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지만, 자네가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야.”
“어떻게 다르다는 겁니까?”
“난 모든 고민을 타파했다네. 내가 원하는 걸 모두 움켜잡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는 게 유감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냥 안타깝다는 얘기였어.”
나는 돈 후앙의 이런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절망감이나 자기연민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페요테, 짐슨위드, 실로시베 속에 포함된 버섯.
세 식물 중 하나를 섭취함으로써 유발되는 의식상태들은 환각이 아니며, 평범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의 명확한 국면들이라는 지적이야말로 돈 후앙의 신념체계의 대전제였기 때문이다. 돈 후앙은 이런 비일상적 현실상태들을 마치 ‘현실인 것처럼’ 대한 것이 아니라 ‘진짜 현실로’ 대했다.
돈 후앙은 이 식물들을 인간을 모종의 비인격적인 힘 내지는 ‘주력呪力’으로 안내하거나 이끄는 운반수단으로 간주했고, 또 이 식물들이 유발하는 여러 상태를 이 ‘주력’에 대한 통제력을 얻기 위해 주술사가 거쳐야 하는 ‘만남’으로서 이해하고 설명했다.
그는 페요테를 ‘메스칼리토’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자애로운 스승이자 인간의 수호자라고 설명했다. 메스칼리토는 ‘올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친다.
“자네가 겁에 질려서 배우기를 그만둔 건 자기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야.”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자네를 둔중하고 어설프고 허영에 찬 존재로 만든다네. 식자가 되고 싶거든 경쾌하고 유연해져야 해.”
이 두 번째 도제수업 주기를 통틀어 돈 후앙이 특히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내게 ‘보는see’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의 지식체계에서 ‘보기seeing’와 ‘바라보기looking’가 서로 뚜렷하게 다른 의미를 갖는 지각방식으로 구분된다는 점은 명백했다. 이 경우 ‘바라보기’란 우리가 외부세계를 지각하는 일상적인 방식을 가리키지만, ‘보기’는 식자가 세계의 이른바 ‘본질’을 인지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의미한다.
“순식간에 흘러가는 그 세계를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필요한 민첩성을 자네에게 줄 수 있는건 스모크밖에 없다네.”
제1부 ‘보기’ 준비
#1
“언젠가는 자네도 타인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고, 그럼 인간을 변화시키는 방법 따위는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걸세.”
“인간을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보게> 되면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네. 작은 스모크의 도움을 받으면 인간을 빛의 섬유로 <볼> 수 있지.”
“빛의 섬유라고요?”
“그래. 흰 거미줄을 닮은 섬유. 머리에서 배꼽까지 순환하는 아주 가느다란 실들이네. 그래서 인간은 순환하는 실들로 이루어진 달걀같다는 거야. 팔다리의 경우는 빛을 내면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빳빳한 털처럼 보인다네.”
“모든 인간이 그렇게 보인단 말입니까?”
“그래. 게다가 모든 인간은 다른 만물과 맞닿아 있네. 손이 닿는다는 게 아니라, 배 한복판에서 튀어나온 긴 실 뭉텅이를 통해 외부와 이어져 있다는 뜻이네. 이 실 뭉텅이는 인간을 주위 환경과 연결해줌으로써 우리의 균형을 유지하고 안정시켜준다네. 그러니까 언젠가는 자네도 <보고> 깨달을지도 모르겠군. 왕이든 거지든 인간은 반짝이는 달걀이고, 뭔가를 변화시킬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자넨 그런 반짝이는 달걀에서 뭘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도대체 뭘?”
#2
기록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숙련된 주술사라면 단지 ‘사회적 단서clue’를 조작함으로써’ 지극히 특수한 지각영역을 유도해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조작적 절차의 성질에 관한 나의 가설은 특정한 지각영역을 유도해낼 수 있는 지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필수 전제로 한다.
“어둠을 어디에 쓸 수 있다는 겁니까?”
돈 후앙은 어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낮의 어둠’- 은 <보기>위해서는 최상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자네도 몇 번이나 미토테(페요테 집회)에 참가해봤잖아. 뭘 느껴야 하는지, 또 뭘 해야 하는지 자네에게 얘기해주는 것은 오직 메스칼리토밖에는 없다는 걸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난 자네가 왜 왔는지 아네.”
“하지만 단서 부여 체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네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군.”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메스칼리토와 만났다는 사실에 관해 달리 어떻게 동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동의하는건 <봤기> 때문이야.”
나는 그가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돈 비센테는 정말로 아름다운 인물이었다. 섬약하기 그지없지만, 묘하게 영적인 그의 두 눈은 마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돈 후앙에게 그토록 아름다운 인물이 어떻게 위험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보는>법을 터득하면 어떤 이점이 있습니까?
분간할 수 있네. 어떤 사물이든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거든.
맹우는 스모크 안에 있는 게 아냐. 스모크는 맹우가 있는 곳으로 자네를 데려가 주고, 자네가 일단 맹우와 하나가 되고 나면 다시는 스모크를 피우지 않아도 돼. 그 시점부터 자넨 맹우를 마음대로 불러내서 뭐든 원하는 일을 시킬 수 있으니까 말이야.
맹우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주술사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쓰는 힘일세. 내가 작은 스모크를 맹우로 선호하는 건 그것이 나한테 많은 걸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야. 스모크는 언제나 한결같고, 공정하다네.
돈 후앙, 맹우는 당신에게 어떻게 보입니까? 예를 들어 제가 본 세 사람, 제 눈에는 보통 인간처럼 보였던 존재들 말입니다. 당신이 봤으면 어떻게 보였을까요?
보통 인간처럼 보였겠지
그럼 진짜 인간하고 어떻게 구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진짜 인간을 <보면> 빛을 발하는 달걀처럼 보이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자들은 언제나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맹우를 <볼> 수 없다고 한 건 바로 그런 뜻에서였다네. 맹우들은 제각기 원하는 형상을 취한다네. 개나 코요테처럼 보일 때도 있고, 땅 위를 굴러다니는 마른 풀 뭉치처럼 모일 때조차 있어. 그 밖의 어떤 형상으로도 말이야.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들을 <볼> 경우, 그것들이 가장한 모습 그대로 보인다는 점이야. 자네가 <볼> 수 있다면, 모든 사물은 독자적인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인간이 달걀처럼 보이고, 다른 존재들은 뭔가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맹우의 경우는 오로지 그들이 보여주는 형상으로만 볼 수 있어. 눈을 속이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인간의 눈 말일세. 하지만 개는 절대 속지 않아. 까마귀도 마찬가지고.
왜 그들은 우리를 속이려고 하는 겁니까?
난 우리 모두가 어릿광대라고 생각하네. 자기 자신을 속이잖나. 맹우들은 근처에 있는 아무것이나 골라서 그 외형을 두르고, 우리는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식이지. 우리가 단지 사물만을 바라보도록 스스로의 눈을 훈련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냐.
돈 후앙, 저는 그들의 역할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세계에서 맹우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그건 우리 인간이 이 세계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똑같아. 나도 정말 모르네. 우린 단지 이곳에 존재할 뿐이잖나. 그리고 맹우들도 우리처럼 여기에 존재할 뿐이야. 어쩌면 우리보다 더 먼저 와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더 먼저 와 있었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인간이 언제나 이곳에 있었던 건 아니라네.
돈 후앙은 그에게는 단 하나의 세계, 그가 발을 디디고 있는 장소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 인간이 언제나 이 세계에서 살았던 게 아니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건 간단해. 우리 인간은 이 세계에 관해 거의 아는 게 없거든. 코요테는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야. 코요테는 세계의 겉모습에 속는 일이 거의 없지.
코요테는 맹우를 <볼> 수 있습니까?
물론이네.
돈 후앙은 맹우는 무슨 일에든 먼저 나서거나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해서만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맹우는 인간의 최악의 면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에 맹우와 접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그런 만남의 충격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거둬내서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고, 바로 그런 연유로 도제수업은 그토록 길고 고된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3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미토테는 내가 고안한 이론적 얼개를 확증하기 위한 최상의 기회였다. 우선 나는 그런 집회의 참가자들 사이에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암묵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멕시코로 오겠다고 결심한 이상, 그런 시시콜콜한 두려움 따위는 모두 내버려야 해.
오겠다고 결심했을 때 진작에 그랬어야 했어. 자네가 여기에 온 건, 오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게 전사의 방식이야. 몇 번이고 얘기했듯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는 방법이란 전사처럼 사는 것이라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오만 가지 생각에 싸여 고민을 해도 무방하지만, 일단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모든 고민과 생각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자네만의 길을 가란 말일세. 그 뒤에도 자네가 내려야 할 결정은 무수히 많아. 그게 바로 전사의 길이라네.
상황이 불확실해지면 전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네.
우리의 정신을 단련시켜주는 건 오직 죽음에 대한 생각밖에는 없다네.
저것들은 죽음의 얼굴에 달린 불빛이라네. 죽음은 그걸 모자처럼 쓴 다음 질주해오지. 저것들은 우리 뒤에서 달려오는 죽음의 불빛이거든. 게다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죽음은 결코 멈춰 서는 법이 없네. 가끔 저렇게 불을 끌 뿐이야.
#4
페요테가 이 모든 걸 어떤 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 사람은 평생을 노새처럼 일만 하면서 살 운명인 것 같은데요.
메스칼리토는 모든 걸 변화시킨다네.
그래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노새처럼 일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야. 내가 메스칼리토 안에 정령이 있다고 한 건 그가 인간을 변화시키는 정령 같은 것이기 때문이야. 눈에 보이고, 만질 수도 있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정령이지. 때로 그게 우리 의지에 반할 때조차도 말이야.
그는 우리에게 올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친다네.
그를 아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지켜주지. 자네들이 살아가는 삶은 삶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야. 만사를 의도적으로 하면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이 뭔지를 전혀 모르니까 말이야. 수호자가 없으니까!
진짜 수호자라면 억지로라도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법이라네.
메스칼리토가 자네들의 수호자가 된다면 싫든 좋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어. 눈으로 볼 수 있으니, 그가 하는 말을 따라야 하는 거지. 메스칼리토는 자네들이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접하게끔 만들 거야. 자네들이 수호자들에게 접근하는 방식과는 딴판이지.
수호자를 찾으려 한다면 인생이 달라지겠지. 정확히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달라질 거라는 점은 확실해.
루시오는 테킬라 말고도 자기 삶을 만족시켜줄 뭔가 다른 걸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 다른 것이 뭐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수호자는 그걸 제공해줄 가능성이 있어.
우리가 아는 일이 얼마나 적고,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안다면 자네들도 이해할 거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술이야. 술은 심상을 흐릿하게 만들지. 반면에 메스칼리토는 모든 것이 명료해지게 해준다네. 너무나도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야. 너무나도!
어떻게 페요테가 그런 일들을 다 한단 말입니까?
우선 그와 아는 사이가 되어야 하네.
내가 보기엔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야. 그런 다음엔 그에게 바쳐져야 하지. 정말로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여러 번 만나야해.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전적으로 자네에게 달렸네. 두려움 없이 그에게 다가가면 그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조금씩 가르쳐줄 거야.
그걸 말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해. 왜냐하면 그건 사람마다 다르게 때문이지.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메스칼리토는 각자에게 은밀하게 자신의 비밀을 밝혀준다는 사실뿐이라네.
#5
그 어떤 일에도 상관하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건 자네한테나 해당하는 일이야. 자넨 온갖 일들에 다 애착을 갖고 있으니까 말이야. 자넨 내게 통제된 우행이 뭔지를 물었고, 난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관련해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통제된 우행이라고 대답했네. 왜냐하면 내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거든.
자네가 인생의 어떤 부분들에 연연하는 건 그것들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네. 자네에게 자네의 행동은 확실히 중요하겠지. 하지만 나의 경우엔 그 어떤 일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네. 내가 하는 행동도, 다른 인간들이 하는 그 어떤 행동도 말이야. 하지만 내가 계속 살아가는 건 내게 의지가 있기 때문이야. 나는 평생 동안 나의 의지를 단련해왔네. 그것이 정돈되고 완전해져서 내겐 그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수준에 이를 때까지 말이야. 바로 그 의지가 내 삶의 우행을 통제하고 있는 거야.
일단 <보는>법을 터득한 사내는 자신이 우행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네.
자네의 행동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들의 행동이 자네 눈에 중요하게 비치는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배운>탓이야.
우린 모든 것에 대해 생각을 하도록 배운다네. 그래서 우린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눈이 그것을 바라보도록 훈련시키지. 우리는 자신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이미 하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 그러니 자신이 중요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거야! 하지만 <보는>법을 배운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이 바라보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그리고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없으면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거야.
예컨대 어떤 사람이 <보는>법을 배우면 온 세계의 모든 것이 무가치해지는 겁니까?
무가치해진다고는 안 했어. 중요하지 않다고 했을 뿐이야. 모든 것이 동등해지고, 따라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거야. 이를테면 나는 결코 내 행동이 자네의 행동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고, 어떤 일이 다른 일보다 더 본질적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아. 따라서 모든 것은 평등해지고, 바로 그 평등함에 의해서 그 중요성을 잃는 거지.
웃기 위해서는 눈을 써서 바라보아야 한다네. 우리는 오직 사물을 바라봄으로써만 우리 세계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지. 반면에 눈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평등해지기 때문에 그 무엇도 우습지 않지.
그렇다면 돈 후앙, <보는> 사람은 아예 웃지도 못한다는 뜻입니까?
아마 결코 웃지 않는 식자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식자와 마주친 것은 없지만 말이야. 내가 아는 식자들은 다들 <보는> 동시에 바라보기 때문에, 웃을 줄 알아.
모든 것이 그토록 평등하다면, 논리적으로 죽음을 선택해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많은 식자가 바로 그런 선택을 하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식으로 말이야. 그럼 사람들은 그가 그의 소행에 앙심을 품은 누군가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하곤 하지. 하지만 그들이 죽음을 선택한건 그러든 말든 상관이 없기 때문이야. 반면에 나는 살아가고 웃는 쪽을 선택했네. 그쪽이 중요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 성향이 그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야. 내가 선택한다고 말하는 건 <보기>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는 쪽을 선택했다는 뜻은 아냐. 내가 뭘 <보든>간에, 내 의지가 나로 하여금 살아가게 만드는 거야.
지금 자네가 나를 이해 못하는 건 바라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되는 대로 생각하는 습관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은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예외 없이 가지고 있는 통념을 뜻하며, <보기>는 그 습관을 제거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보는> 법을 터득하기 전까지는 그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돈 후앙,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면 제가 <보는> 법을 터득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좋든 나쁘든 간에 사람은 배우기 위해 사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나. 나는 <보는> 법을 배웠고,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네. 그리고 이번에는 자네가 그럴 차례야. 언젠가는 자네도 <보고>, 그럼으로써 뭐가 중요한지 안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될지도 몰라. 나에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지만, 자네에겐 모든 것이 중요할 지도 모르지. 식자는 행동하며 살지, 행동에 관해 생각하거나 행동을 마친 뒤에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할지를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는다는 걸 자네도 이젠 알잖나. 식자는 마음이 깃든 길을 골라서 그걸 따라 가네. 식자는 주위를 바라보고 기뻐하며 웃음을 터뜨리다가, <보고> 아는 거야. 식자는 자기 삶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리라는 사실을 아네. 식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디에도 안 간다는 걸 알고 있어. 식자는 <보고> 알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중요한 것 따윈 없다는 걸 알아. 바꿔 말해서 식자에게는 명예도, 존엄성도, 가족도, 이름도, 나라도 없고, 단지 살아가야 할 삶만이 존재할 뿐이라네. 그리고 이런 상황하에서 다른 인간들과 식자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은 통제된 우행밖에는 없어. 그런 연유로 식자는 노력하고, 땀을 흘리고, 헐떡인다네. 겉보기에는 보통 사람과 하등 다르지 않지. 그의 삶의 우행이 통제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야. 다른 것보다 중요한 것 따윈 없는데도, 어떤 행위를 선택해서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야. 통제된 우행은 식자로 하여금 자기가 하는 행동은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말하게 하고,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 그래서 그는 그런 행동을 끝마친 뒤에 평온하게 물러서지. 자기가 한 행동이 선하든 선하지 않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본인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네.
반면에 식자는 완전히 무감동해지는 쪽을 택하고 아예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도 있어. 마치 무감동한 것이 본인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인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그럴 경우도 역시 진실이라네. 그게 바로 그의 통제된 우행이기 때문이지.
자넨 자기 행동에 관해 생각을 해. 그래서 자네는 그 행동이 자네가 생각하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믿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야. 실제로는 인간의 그 어떤 행동도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말이야. 전혀! 하지만 자넨 내게 물었지. 그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계속 살아갈 수 있느냐고. 차라리 죽는 쪽이 더 쉽지 않느냐고. 그게 바로 자네가 말하고 믿고 있는 것이야. 왜냐하면 자네는 삶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지금 자네가 <보는> 것이란 어떤 것일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일세. 방금 자넨 그것에 관한 생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나한테 그걸 설명해달라고 한거야. 평소 자네가 늘 하던 방식으로 말이야. 하지만 <보기>의 경우는 생각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에 난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자네에게 설명해줄 수가 없다네. 자넨 내가 왜 통제된 우행을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것 같은데, 통제된 우행은 <보기>와 아주 닮았다는 얘기밖에는 해줄 수가 없군. 그건 생각해서 이해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
자네는 너무 오래 여길 떠나 있었던 것 같군. 자넨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정말로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설령 식자가 된다 해도 방금 얘기한 그 노인처럼 공허해지고,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느낌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가 않아.
자네 친구가 고독한 건 <보는> 걸 모르고 죽어야 하기 때문이야. 그는 살아오면서 단지 나이를 먹기만 했고, 자기연민이 쌓인 탓에 본인도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 처지가 된 걸세. 승리를 좇았지만 단지 패배밖에는 못 겪었기 때문에 40년을 허비했다고 느끼는 거지. 승리와 패배는 똑같은 거라는 사실을 그가 아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그런데 자넨 자네가 다른 모든 것과 동등하다고 하니까 내가 두려워졌다, 이건가? 그건 어린애 같은 태도야. 인간이란 배우기 위해 사는 것이고, 전쟁에 임한 것처럼 지식을 향해 전진해야만 하네. 이 얘기는 이미 수도 없이 했을 텐데. 지식이나 전쟁에 임할 때는 두려움과 존경심, 그리고 자신이 전쟁에 임한다는 자각과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해. 내가 아니라 자네 자신을 신뢰하란 말일세.
그러니까 자넨 그 친구의 삶의 공허함이 두려운 거로군. 하지만 식자의 삶에는 공허함이란 없다네. 정반대야. 모든 것이 철철 넘칠 정도로 가득 차 있거든.
모든 게 넘치도록 가득 차 있어.
그리고 모든 것이 동등해. 난 그저 나이만 먹은 자네 친구와는 달라. 내가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한 건 자네 친구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뜻으로 한 말이야. 그 친구가 그렇게 힘들여 투쟁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실토한 건 그가 패배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내겐 승리도, 패배도, 공허함도 없네. 모든 것이 넘치도록 가득하고, 모든 것은 동등하고, 내 삶은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었어.
식자가 되려면 전사처럼 행동해야지, 칭얼거리는 어린애처럼 굴어서는 안 되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고, 위축되지도 않고 노력하는 거야. 직접 <보고>,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나는 통제된 우행이란 식자가 된 이상 그 누구도 좋아할 수 없다는 뜻인지 물어봤다.
자넨 누구를 좋아한다, 싫어한다 하는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군. 식자는 단지 좋아할 뿐이라네. 누구, 혹은 무엇을 좋아하든 그건 식자 마음이지만, 통제된 우행을 써서 그 사실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거야.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지.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거나 누군가의 호감을 사거나 하는 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가 아니라네.
<보고> 싶으면 스모크한테 안내를 받아야 해.
아들의 죽음.
나도 함께 서 있었지만, 바라보지는 않았네. 눈을 바꿔서 내 아들의 개인적 삶이 해체되어 마치 수정같이 투명한 안개처럼 그 한계를 넘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가는 광경을 <보고> 있었던 거야. 삶과 죽음은 바로 그런 식으로 섞이면서 확산한다네. 내 아들이 죽는 순간 내가 했던 일은 이거야. 누구든 그럴 수밖에 없고, 그게 바로 통제된 우행이라네. <보고>있지 않았다면 아들이 움직임을 멈추는 광경을 바라보았을 테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통곡이 솟구쳐 올라오는 걸 느꼈겠지. 아들의 건강한 몸이 지상을 활보하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실감했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난 그러는 대신 아들의 죽음을 <보는>쪽을 택했고, 그 행위에 슬픔이나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네. 아들의 죽음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과 동등한 것이었거든.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을 경우, 내 통제된 우행은 눈을 바꾸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
통제된 우행은 나 자신, 그리고 같은 인간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하는 행동에만 해당하네.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건 내가 다른 인간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난 내 맹우를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에 맹우를 이해할 수가 없어. 꿰뚫어 <볼> 수 없는 존재를 상대로 어떻게 내 우행을 통제할 수 있겠나? 내 맹우나 메스칼리토를 상대할 때의 나는, <보는> 법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해하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네. 결코 주위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인간이지.
자네를 예로 들어보지. 자네가 식자가 되든 못 되든 내겐 전혀 중요하지 않다네. 하지만 메스칼리토가 그걸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명백해. 중요하지 않다면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가며 자네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난 메스칼리토가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아차리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해왔지만, 그가 그러는 이유가 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네.
#6
식물은 따기 전에 우선 말부터 걸어야 해.
해당 식물을 <보기> 위해서는 직접 말을 나눠야 하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될 필요가 있는 거야. 그럼 식물은 그것에 관해 자네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뭐든지 가르쳐줄 걸세.
주술사가 <보려고> 하는 건 힘을 얻기 위해서야.
만일 내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내 삶 전체는 단지 사적인 혼돈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죽음 말고 인간에게 달리 뭐가 있겠나?
제2부 ‘보기’ 실행
#7
자신의 힘만으로 <보는> 법을 배울 수는 없는 건가요? 저는 진심으로 그걸 터득하고 싶습니다.
<보기>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냐. 순식간에 흘러가는 그 세계를 잠깐만이라도 보기 위해 필요한 민첩성을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건 스모크밖에 없다네. 그게 없다면 자넨 단지 바라보는 수밖에 없을 거야.
순식간에 흘러가는 세계가 뭡니까?
주술사들이 <보는> 세계는 자네가 생각하는 세계와는 달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면서 언뜻 스쳐 지나가는 세계라고나 할까. 자신의 힘만으로도 순식간에 흘러가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다가는 몸이 그 긴장을 못 이겨서 쇠약해지기 때문에 본인에겐 하등 도움이 안 돼. 반면에 스모크를 쓰면 그런 피로에는 전혀 시달리지 않아도 돼. 스모크는 자네에게 세계의 순간적인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민첩성을 부여해주고, 그와 동시에 몸이 축나지 않도록 체력을 고스란히 보존해주거든.
#8
일종의 몽상에 푹 잠긴 상태에서,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하면 나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또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딱히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긴장을 푸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스모크는 문지기를 <보는> 유일한 방법입니까?
아니. 그것 없이도 <볼> 수 있어. 그럴 줄 아는 사람들은 많네. 내가 스모크를 선호하는 건 그쪽이 더 효율적이고 덜 위험하기 때문이야. 만약 스모크의 도움 없이 문지기를 <보려고> 한다면, 제뗴에 몸을 피하지 못할 공산이 커. 자네 경우를 예로 들자면, 문지기가 등을 돌렸을 때 적대적인 색깔을 보여준 건 명백히 자네에게 주는 경고였네. 그런 다음 문지기는 자리를 떴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도 자네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걸 보고 돌진해왔던 거야. 하지만 자넨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약했어. 작은 스모크가 자네에게 필요한 보호막을 제공해줬던 거지. 자네가 그 도움 없이 그 세계로 갔더라면 문지기한테 잡혀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야.
왜요?
자네의 움직임은 너무 느렸을 테니까. 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번개처럼 빨라야 한다네. 방에서 나갔던 건 내 실수지만, 그건 자네가 더 이상 말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야. 자넨 워낙 말이 많아서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경우에조차 말을 하잖나. 내가 함께 있었더라면 자네 머리를 들어줬겠지. 그래도 자넨 자네 힘으로 도약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더 잘 됐다고 해야겠군. 하지만 그런 위험은 무릅쓰지 않는 편이 낫네. 문지기는 섣불리 가지고 놀 수 있는 존재가 아냐.
#9
자넨 너무 약해. 기다려야 할 때는 서두르고, 서둘러야 할 때는 기다리잖나. 게다가 생각이 너무 많아. 지금은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네는 더 이상 스모크를 피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자네의 삶은 너무 느슨해. 작은 스모크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팽팽하지 못하다는 뜻이야. 난 자네를 돌볼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자네가 바보 멍청이처럼 죽는 건 원하지 않네.
그럼 돈 후앙,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이 급해서.
전사처럼 살아야 해! 이미 얘기했듯이 전사는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네. 그 행동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말이야. 자넨 뭔가 생각이 나면 금방 실행에 옮기는데, 그건 잘못된 행동일세. 문지기 건이 실패한 건 바로 그 생각 때문이라는 걸 모르나.
제가 어떻게 실패했다는 겁니까?
모든 것에 대해 생각을 했기 때문이야. 자넨 문지기에 관해 생각을 했고, 그 때문에 그걸 이기지 못했어. 우선 자넨 전사처럼 살아야 하네.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네만.
자네의 삶은 상당히 팽팽해. 사실, 헤나로의 제자인 파블리토나 네스토르보다 더 팽팽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볼> 수 있는데 자네는 그러지를 못해. 자네 삶은 엘리히오보다 더 팽팽하지만 아마 그 아이는 자네보다 먼저 <볼> 수 있을 거야. 난 바로 그 부분이 걸리는 거야. 헤나로조차도 영문을 몰라 하더군. 자넨 내가 한 모든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했어. 난 내 은사가 배움의 첫 단계에서 내게 가르쳐준 모든 걸 자네에게 전수해줬네. 그 규칙은 언제나 올바르고, 그 절차는 절대로 변경될 수 없어. 자네도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행했지만 여전히 못 <보고> 있어. 하지만 헤나로처럼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자네는 마치 <보는> 것처럼 보인다네. 나도 그런 줄 알았다가 속았지. 성공했다 싶으면 자넨 휙 돌아서서 <볼> 줄 모르는 멍청이처럼 행동하곤 했어. 물론 자네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었겠지만 말이야.
“자넨 아직 패배하지 않았어.”
패배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 중 하나라고 돈 후앙은 설명했다. 인간은 승리하거나 패배하기 마련이고, 그 결과에 따라 박해자나 희생자가 된다. 본인이 <보는> 법을 터득하지 않는 한 이 두 조건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그를 옭아매지만, <보기>는 승리나 패배나 괴로움이라는 환상을 타파하게 해준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누군가에게 굴욕당하는 기억을 얻게 될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승리자로 남아 있는 동안에 <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해.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뭘 기다리는지를 아는 상태에서 말이야. 그게 전사의 방식일세. 만약 그게 자네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라면 자네가 그걸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해. 그러면 기다림도 끝날 때가 올 거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자네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될 거야. 그 어린 소년의 삶을 위해 자네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오직 그 소년만이 자네가 한 행위를 무효화할 수 있다네.
하지만 어떻게?
자기 자신의 욕구를 완전히 없애는 방법으로. 그 소년이 자기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한은 그의 인생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일 걸세. 그리고 자네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한은 그 약속의 효력도 지속될 거야.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건 바로 욕망이라네. 하지만 욕망을 완전히 없애는 방법을 터득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더라도 진정한 선물이 되지. 그러니까 평정을 되찾게. 자넨 와칸에게 좋은 선물을 했어. 가난하다거나 결핍되었다는 건 단지 생각에 불과해. 증오도, 허기도, 고통도 마찬가지야.
돈 후앙, 저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허기나 고통이 단지 생각에 불과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나에겐 생각에 불과하다네.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야. 난 그 위업을 이뤘다네. 우리에겐 단지 그러는 능력밖에는 없어. 명심하게. 우리 삶을 관장하는 힘들에 대항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그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티끌이나 다름없고,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에 불과해.
돈 후앙, 당신이 그랬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하지 않지만, 어떻게 저나 어린 와킨처럼 단순한 인간들이 그런 일을 성취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인생을 관장하는 힘들에 대항하는 선택은 오직 본인에게 달려 있네. 지금까지 수십 번, 수백 번 얘기했잖나. 오직 전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전사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으며, 또 뭘 기다리고 있는지를 안다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전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고로 아무리 사소한 걸 얻더라도 모자라지 않고 남아도는 거야. 전사는 먹을 필요가 있으면 그럴 방법을 찾아낼 수 있네.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이지. 전사는 무엇인가가 자기 몸을 아프게 하면 그걸 막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 아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야. 배가 고프거나 고통을 느낀다는 건 스스로를 내던졌고, 더 이상 전사가 아니라는 뜻이야. 그런 자는 배고픔과 고통의 힘에 휩쓸려서 파멸을 맞는다네.
나도 옛날에 맹세를 한 적이 한 번 있네.
일생을 바쳐서라도 아버지를 죽인 놈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아버지 앞에서 맹세했었지. 난 몇십 년 동안이나 그 약속을 마음에 담고 살았다네. 하지만 지금 그 약속은 바뀌었어.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일에 나는 더 이상 관심이 없네. 멕시코인들을 미워하지도 않아.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지. 살아가면서 가로지르는 무수히 많은 길들은 모두 동등하다는 걸 터득했거든. 압제자들도 희생자들도 마지막에 가서는 만나게 되고, 거기서 유일하게 확실한 부분은, 삶이 양쪽 모두에게 너무 짧았다는 사실뿐이야. 오늘 내가 슬픈 건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죽었기 때문이야. 내가 슬픈 건 그들이 인디언이었기 때문이라네. 그들은 인디언처럼 살다가 인디언처럼 죽었다네.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가 없었던 거야.
#10
자넨 전사처럼 행동해야 해.
어떻게요?
그건 말이 아닌 행동으로 터득해야 하네.
전사는 자신의 죽음에 관해 생각한다고 하신 적이 있죠. 저는 언제나 그러고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게 명백해 보이는군요.
.
전사처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걸 낱낱이 설명해주길 바라는구먼. 그렇지?
제 머리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서요.
반드시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어.
이걸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전사처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비는 겁니다. 그걸 안다면 제 쪽에서 그것에 적응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보기> 위한 탐구에 나서기 전에 자네는 그 문지기를 완전히 망각해야만 하네.
어떻게 그런 존재를 망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전사는 자기 의지와 인내심을 써서 망각한다네. 사실, 전사에게는 오로지 의지와 인내심밖에는 없고,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만들어 낼 수 있어.
하지만 저는 전사가 아닙니다.
자넨 주술사의 방식을 이미 배우기 시작했잖아. 이젠 후퇴하거나 후회할 여유 따위는 없어. 단지 전사처럼 살면서 인내심과 의지를 함양할 여유밖에는 없단 말일세. 자네가 그러고 싶든 말든 말이야.
전사는 그것들을 어떻게 함양합니까?
그걸 말로 설명할 방법은 없는 것 같군. 특히 의지에 관해서는 말이야. 의지는 아주 특별한 그 무엇이라네. 의지는 불가사의하게 생겨나거든. 의지를 쓰면 경탄할 만한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 말고는, 그걸 어떻게 쓰는지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없어. 자네가 가장 먼저 명심할 점은 의지를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전사는 그걸 알고, 그것이 오기를 기다린다네. 자네의 문제는, 자네가 스스로의 의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야.
내 은사는 전사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뭘 기다리는지도 안다고 말했네. 자네의 경우에는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아. 여기서 몇 년이나 수행을 했지만, 자기가 뭘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야. 보통 사람이 자기가 뭘 기다리는지를 안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힘든 일이지. 하지만 전사에겐 그런 문제가 없어. 자기 의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아니까 말이야.
이 의지라는 게 정확하게 뭡니까? 결심을 말하는 겁니까? 루시오가 모터사이클을 꼭 가져야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아냐. 그건 의지가 아냐. 루시오는 단지 스스로에게 도취해 있는 것에 불과해. 의지는 그것과는 다르고, 우리의 행동을 지휘할 수 있는 아주 명확하고 강력한 그 무엇이야. 이를테면 객관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질 수 밖에 없는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쓰는 것 같은 거지.
그렇다면 그건 우리가 용기라고 부르는 것 아닙니까.
아냐. 용기는 그것과는 또 달라. 용기 있는 인간이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고귀한 인물이고 늘 숭배자들에게 에워싸여 있지만, 용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네. 용기가 있는 사람이란 보통 위험천만하지만 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을 뜻하네. 대부분의 경우 용기 있는 사람은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 되곤 하지. 반면에 의지는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믿기 힘든 위업과 관련이 있다네.
그럼 의지란 스스로를 통제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일종의 통제하는 힘이라고 해도 되겠지.
그렇다면 제가 원하는 걸 스스로 자제하는 식으로 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냐. 자제심 또한 자기도취이고, 그런 걸 권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네. 자네가 마음껏 질문하도록 놓아두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야. 만약 자네더러 질문하지 말라고 명령한다면, 그러기 위해서 자넨 자기 의지를 왜곡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자기도취 중에서도 자기부정이 제일 안 좋아. 실제로는 자기 내부의 틀에 고정되어버리면서도, 정작 본인은 자신이 아주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어버리니까 말이야. 자네가 질문을 멈추는 건 내가 말하는 그런 의지가 아닐세. 의지는 능력power이야. 능력인 고로 통제되고 조정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한 거야. 난 그걸 알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자네를 대하는 걸세. 나도 자네 또래였을 때는 자네 못지않게 충동적이었어. 하지만 나는 변했어. 우리의 의지는 욕심과는 무관하게 작동한다네. 예를 들자면 자네의 의지는 이미 자네의 틈새를 조금씩 벌리고 있어.
틈새라니요?
우리 내부에는 틈새가 있다네. 갓난애 머리에 있는, 나이를 먹으면 닫히는 말랑말랑한 부분처럼 말이야. 의지를 발달시키면 그 틈새가 열리는 거지.
그 틈새는 어디에 있습니까?
자네의 반짝이는 실들 부근에.
그는 자기 복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어떤 겁니까? 뭘 위한 거죠?
열린 부분이야. 의지는 거길 통해서 화살처럼 튀어나오지.
그럼 의지란 물체입니까? 아니, 물체를 닮은 겁니까?
아냐. 화살 운운한 건 자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에 불과해. 주술사가 의지라고 부르는 건 우리 내부의 힘이라네. 그건 생각이나 물체가 아니고, 소원도 아냐. 질문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머리로 생각하고 원해야 하기 때문에 그건 의지가 아니지. 의지란 머릿속의 생각이 너는 패배했다고 선언할 때 승리할 수 있게 해주는 거라네. 의지란 자네를 불사신으로 만들어주고, 주술사가 견고한 벽을 뚫고 지나가거나 공간을 가로지르게 해주는 거야. 원한다면 달로도 가게 해주지.
돈 후앙은 의지를 인간과 세계를 이어주는 진정한 접점이 되어주는 힘으로 묘사했다. 그러면서도 세계란 우리가 지각하는 그것,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지각하기로 선택하는 그것을 의미한다고 신중하게 강조하기를 잊지 않았다. 돈 후앙은 ‘세계를 지각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간에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을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지각’은 우리의 오감과 우리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럼 의지란 여섯 번째 감각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내가 물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와 지각된 세계 사이의 관계에 더 가깝다고 그는 대답했다.
자네가 의지라고 부르는 건 개인의 성격에서 나오는 강한 기질이지만, 주술사가 의지라고 부르는 건 내부에서 나와서 바깥의 세계에 달라붙는 힘일세. 바로 이 배에서 나와. 반짝이는 실들이 있는 곳에서 말이야.
그는 자기 배꼽 부분을 문질러 그게 정확히 어느 곳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나오다고 말한 건 본인이 실제로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야.
왜 그걸 의지라고 부르는 겁니까?
난 딱히 뭐라고 부르지는 않아. 하지만 내 은사가 그걸 의지라고 불렀고, 다른 식자들도 의지라고 부르거든.
어제는 의지뿐만 아니라 오감을 써서 세계를 지각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보통 인간은 세계 속의 사물을 손이나 눈이나 귀만 써서 ‘파악’할 수 있지만, 주술사는 자기 코나 혀나 의지를 써서 파악할 수 있다네. 특히 의지를 써서 말이야. 말로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어. 하지만 자네도 자네가 어떻게 듣는지를 내게 설명하지는 못하지 않나. 마침 나도 들을 수 있으니까 우리 두 사람은 우리가 듣는 것에 관해 얘기할 수 있지만, 어떻게 듣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얘기할 수가 없어. 주술사는 자기 의지를 써서 세계를 지각한다네. 하지만 그 지각은 청각과는 달라.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거나 그 소리를 들을 때는 바깥세계는 실제로 있고 또 현실적이라는 인상을 받지. 하지만 의지를 써서 세계를 지각할 때는 그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저 밖에’ 있지도 않고, 또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된다네.
그럼 의지는 <보기>와 같은 겁니까?
아니, 의지는 힘이고 주력일세. 그렇지만 <보기>는 힘이 아니고, 사물을 투과하는 방식에 가까워. 아주 강한 의지를 가진 주술사도 못 <보는> 경우가 있다네. 따라서 자기 오감과 의지뿐만 아니라 <보기>를 써서 세계를 지각하는 존재는 식자밖에는 없다는 얘기가 되겠지.
스스로 하는 모든 일을 주의 깊게 관찰하게. 자네 의지의 발달을 도와줄 수 있는 건 자네가 하는 모든 작은 일들 가운데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야.
의지는 개념이 아니네.
내 은사는 위대한 주술사였지만 나나 헤나로가 <보는> 방식으로는 <볼> 수가 없었거든. 나는 내가 <본> 것을 길잡이 삼아 이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네. 반면 내 은사는 전사처럼 살아가야 했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전사처럼 살아갈 필요가 없다네. 그 무엇이 될 필요도 없지. 왜냐하면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면 그만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자네 성격을 감안하건대 자넨 결코 <보는> 법을 터득 못할 가능성도 있어. 그럴 경우 자넨 평생을 전사처럼 살아가야 할걸세.
내 은사는 일단 주술의 길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조금씩 자각하게 된다고 했네. 과거의 일상적인 삶으로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고, 지식을 터득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이며, 일상적 세계의 생활방식은 더 이상 완충제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살아남으려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채택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리고 그 시점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전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건 아주 중요한 절차이자 결정이라고 했네. 지식의 무시무시한 성질 탓에 전사가 되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지.
지식이 무시무시한 것임을 알 무렵에는 죽음이 언제나 내 곁에 앉아 있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동반자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네. 능력으로 변모하는 모든 지식의 핵심에는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죽음이야말로 모든 것에 와 닿는 궁극적인 것이고, 무엇이든 죽음에 닿은 것은 정말로 능력이 되는 거야.
주술의 길들을 따라가는 사람은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즉각적인 파멸의 가능성과 항상 마주치고, 싫어도 스스로의 죽음에 극도로 민감해질 수밖에 없어. 누구든 죽음의 자각 없이는 범용한 행위를 하는 범용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뜻이야. 이승에서의 일상적인 시간을 주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집중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지.
따라서 전사가 되려면 모든 일에 우선해서 스스로의 죽음을 예민하게 의식해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죽음을 걱정하고 있으면 누구든 자기 자신에게만 주의가 고정돼버릴 거고, 그건 심신의 약화로 이어지지. 따라서 전사에게 그다음으로 필요한 건 초연함일세. 임박한 죽음에 대한 생각이 강박관념이 되는 대신 무심함으로 변하는 거지.
이해했나?
이제 자넨 초연해져야 하네.
무엇으로부터요?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져야 해.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는 은둔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은둔자가 된다는 건 자기도취이고, 난 결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닐세. 은둔자는 은둔자가 되려는 욕심에 자기를 내던진 것이기 때문에, 결코 초연해질 수 없어.
오직 죽음에 대한 생각만이 사람을 충분히 초연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는 그 무엇에도 자기를 내던지지 못하네. 오직 죽음에 대한 생각만이 사람을 충분히 초연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는 그 무엇도 거부할 수 없어. 하지만 그런 종류의 인간은 삶과, 삶을 통해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조용한 욕망을 획득하기 때문에 무엇을 갈망하거나 하지는 않네. 자신의 죽음이 살금살금 다가오는 걸 알기 때무에 무엇에 집착할 여유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는 갈망함 없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시도해본다네.
초연해진 사람은 죽음을 멀리하는 일 따위가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의지할 것을 딱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아. 선택의 힘 말이야. 말하자면 자기가 내리는 선택의 지배자가 되는 거야. 그런 사람은 자기가 내리는 선택은 온전히 자기 책임이고, 일단 선택을 하면 더 이상 후회하거나 스스로를 탓할 시간은 없다는 걸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해. 그가 내리는 결정이 최종적인 이유는 단순해. 죽음은 그가 다른 것에 매달릴 시간 따위를 절대로 주지 않기 때문이야.
그런 연유로, 자신의 죽음을 자각함으로써 초연해진 전사는 선택에 대한 지배력을 통해 자기 삶을 전략적으로 관장한다네. 자신은 죽는다는 사실이 그를 인도하여 초연해지게 하고 조용한 욕망을 가지게 만드는 거야. 전사는 자기가 내리는 최종적인 선택의 힘으로 인해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그런 그가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전략적으로 가장 훌륭한 길이라네. 따라서 그는 자신이 해야 하는 모든 일을 열정적이고 활기차게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거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이 전사이며 인내심을 획득했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어!
일단 인내심을 획득하면 전사는 의지를 향한 길을 걷고 있는 걸세. 기다리는 법도 알아. 자신의 죽음과는 친구 사이가 되어서, 돗자리에 앉을 때도 함께 앉지. 죽음은 전사에게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하면 전략적으로 살 수 있는지를 불가해한 방식으로 충고해준다네. 그렇게 해서 전사는 기다리는 거야! 자기 의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니까 전사는 배움에도 조급성을 보이지 않아.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에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을 성취하게 되지. 본인은 스스로의 경탄할 만한 행동을 아예 못 깨달을 수도 있어. 하지만 계속 그렇게 불가능한 일들을 이뤄내거나, 혹은 불가능한 일들이 그에게 계속 일어난다면 그는 일종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거야. 지식의 길을 나아가는 전사의 몸 안에서 나오는 힘이지. 처음에는 배가 근질근질하거나, 뜨겁지만 다스릴 수가 없는 부분이 생긴 듯한 느낌을 받아. 그건 곧 고통이 되고, 엄청난 불쾌감으로 바뀌지. 이런 고통과 불쾌감은 때로는 너무 심한 나머지 몇 달 동안이나 경련이 멈추지 않는 경우조차 있어. 하지만 전사가 겪는 경련은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좋은 징조라네. 크나큰 고통 뒤에는 언제나 훌륭한 능력이 찾아오니까 말이야.
경련이 멎으면 전사는 자신이 주위의 사물에 대해 묘한 감각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네. 배꼽 바로 위나 아래에서 나오는 느낌을 써서 원하는 걸 뭐든지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야. 그 느낌이 바로 의지라네. 그걸 써서 물건을 움켜잡을 수 있게 된다면 전사는 자기 의지를 획득했고, 이제는 자신이 주술사임을 확언할 수 있는 거지.
고통은 필수불가결하지는 않다고 그는 말했다. 이를테면 돈 후앙 본인은 전혀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의지가 그냥 찾아왔다고 했다.
내 은사는 막강한 힘을 지닌 주술사였네.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사였지. 내 은사의 의지는 정말이지 엄청난 위업이었어. 하지만 사람은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도 있다네. <보는> 법을 터득함으로써 말이야. <보는> 법을 터득하면 더 이상 전사처럼 살 필요도 없고, 주술사가 될 필요도 없어. <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무無가 됨으로써 모든 것이 될 수 있거든. 사라지면서도 여전히 존재한다고나 할까. 이렇게 되면 사람은 뭐든지 될 수 있고 원하는 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다른 인간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대신에 우행의 한복판애서 그들을 만난다네. 이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볼> 줄 아는 사내는 자신의 우행을 통제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야. <볼> 줄 아는 사내는 더 이상 다른 인간들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느끼지 않는다네. <보기>를 통해 과거에 알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이미 초연해졌기 때문이지.
우리 인간의 본분은 배우는 거야. 우린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들로 내던져질 운명이라네.
정말로 우리가 갈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남아 있다는 겁니까?
멍청하긴. 우린 아직 아무것도 소진하지 않았어.
<보기>는 완전무결한 사람들을 위해 있는 거야. 자네의 정신을 단련해서 전사가 되고, <보는> 법을 배우게. 그러면 우리가 목표로 삼을 새로운 세계들에는 끝이 없다는 걸 알게 될거야.
#11
정말로 <보는> 경우엔 우리 세계의 낯익은 특징은 어디에도 없다네. 모든 게 새로워지는 거야. 예전에 알건 건 단 하나도 없어. 믿을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지는 거지!
왜 믿을 수 없다는 겁니까? 무엇을 믿을 수 없다는 거죠?
그 무엇도 낯익은 것이 없다는 뜻이야. 자네가 응시하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무로 변한다는 거야! 어제 자넨 나를 <본> 것이 아니었어. 자넨 내 얼굴을 응시했을 뿐이야. 자넨 나를 좋아하니까 내 광채를 느꼈던 거지. 그 문지기처럼 괴물로 보이는 대신 아름답고 흥미롭게 느껴졌겠지. 하지만 자넨 나를 <보지> 않았어. 자네 눈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하지 않았잖아. 그래도 잘 했네. 자넨 <보기>로 이어지는 첫걸음을 내디뎠어. 나에게만 집중한 게 옥의 티였지만 말이야. 그럴 경우에 자네에겐 내가 그 문지기보다 나을 것이 없어. 자넨 양쪽 모두 굴복해버리고 결국 <보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사물이 정말 없어지나요? 어떻게 사물이 ‘무’가 될 수 있습니까?
사물이 없어지지는 않아. 사라진다는 뜻으로 말한 게 아냐.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야.
<보기>는 단지 바라보고 조용히 있는다고 가능해지는 일이 아니라네. <보기>는 배워야 쓸 수 있는 기술이야. 개중엔 처음부터 이미 그 기술을 쓰는 법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보기>란 맹우와 주술사들의 기술과는 독립된 하나의 절차라고 얘기했다. 주술사란 맹우를 부림으로써 자기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그 맹우의 힘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하지만, 맹우를 부린다고 해서 곧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예전에 그가 맹우가 없으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돈 후앙은 매우 침착한 어조로 <볼> 수 있으면서도 맹우를 부리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대답했다. <보기>는 같은 인간에게만 효력을 발휘하는 주술의 조작기술과는 전혀 무관하므로,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였다. 반면에 <보기>의 기술은 인간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했다.
<보기>는 주술이 아냐. <볼> 수 있는 사람은 맹우를 조작하는 법을 삽시간에 배워서 주술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혼동하는 건 쉽지만 말이야.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맹우를 부릴 수 있는 특정 기술을 습득해서 주술사가 되기도 하지만, <보는> 법은 결코 터득하지 못해.
게다가 <보기>는 주술과는 상반되는 거라네. <볼> 수만 있으면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거든.
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까?
모든 게 중요하지 않아.
#12
자네는 문지기를 자네가 알고 있는 무엇으로 간주했어.
자넨 그게 추하다고 느꼈잖나. 엄청나게 크다, 괴물이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자넨 그런 말들이 뭘 뜻하는지 알아. 그래서 문지기는 언제나 자네가 아는 어떤 존재로 나타났고, 그것이 그런 식으로 자네가 아는 존재로 남아 있는 한 자네는 그걸 <볼> 수 없었던 거야. 문지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면서도 자네 앞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에 존재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야 하는 거야.
돈 후앙,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말이 안 되는 소립니다.
말이 안 되지. 하지만 <보기>란 원래 그런 거라네. 말을 써서 그걸 설명할 방법은 없어. 전에도 말했듯이 <보기>는 <보기>를 통해서만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야.
자넨 스스로를 내던졌어. 그것도 의도적으로. 그건 잘못된 행동이야.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다시 한 번 얘기해두겠네. 브루호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전사가 되는 수밖에 없어. 전사는 경의를 가지고 모든 것을 대하고, 필요하지 않은 이상 뭔가를 짓밟지는 않네. 그런데 어제 자네는 경의를 가지고 물을 대하지 않았어. 평상시에는 아주 잘 행동하는데도 말이야. 하지만 어제 자넨 구제불능인 멍청이처럼 죽음에다 자기 자신을 내던졌네. 전사는 그 무엇에도 자신을 내던지지는 않아.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고 해도 말이야. 전사는 무슨 일에든 기꺼이 응하는 동반자도 아니고, 무엇에게든 자발적으로 이용당하는 존재가 아냐. 만약 전사가 어떤 일에 관여한다면, 그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그런다는 점은 확신해도 되네.
전사의 삶이란 전략적인 실천이라네. 자넨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지만, 전사는 의미 따위엔 개의치 않아. 만약 루카스가 전사처럼 살았다면 자기 삶을 전략적으로 관리했을 거야. 그리고 루카스에게는 그럴 기회가 있었어. 그럴 기회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니까 말이야.
내가 자네에게 얘기해줄 수 있는 건, 전사는 결코 순순히 이용당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점이야. 두들겨 맞을 때까지 길가에 멍하게 서있거나 하지는 않는단 말일세. 따라서 그는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날 기회를 최소화한다네. 자네가 사고라고 부르는 건,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멍청이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경우 아주 쉽게 피할 수 있는 것들이라네.
#13
‘티벳 사자의 서’
그 친구들은 왜 그것이 마치 삶인 것처럼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지 모르겠군.
그게 그들의 이해 방식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티벳인들도 <볼> 줄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사람이 <보는> 법을 터득하고 나면 그가 아는 것은 무엇 하나도 힘을 쓰지 못한다네. 그 어떤 것도 말이야. 만약 티벳인들이<볼>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예전과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즉시 간파했을걸. <볼> 줄 아는 사람에겐 더 이상 아는 게 없어. <볼> 줄 모르던 시절에 알던 것들은 단 하나도 그대로 남아 있지 않거든.
혹시 <보기>는 사람에 따라 다 같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이네. 다 같지는 않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우위에 선다는 뜻은 아냐. 일단 <보는> 걸 터득하면, 예전과 같은 건 단 하나도 남지 않아.
티벳인들이 죽음을 삶과 닮은 걸로 간주한다는 점은 명백하군요. 당신은 죽음이 뭘 닮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음은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어. 티벳인들은 뭔가 다른 것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 같군. 하여튼 간에, 그들이 얘기하고 있는 건 죽음이 아냐.
그럼 무슨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자네가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는 사람은 자네지 내가 아니잖나.
아마 티벳인들은 정말로 <본> 건지도 모르지. 그게 사실이라면 그 친구들은 필시 자기들이 <본> 것이 전혀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을 걸세.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책으로 써서 남겼던 거야. 그들 입장에서는 뭘 쓰든 상관없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럴 경우엔 그들이 써서 남긴 그것은 전혀 헛소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티벳인들이 무슨 얘길 하든 저도 크게 상관 안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는 얘기에는 당연히 신경이 안 쓰일 리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죽음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다는 겁니다.
죽음은 소용돌이라네. 죽음은 맹우의 얼굴이고, 지평선 위에서 반짝이는 구름이지. 죽음은 메스칼리토가 자네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이고, 이빨 없는 문지기의 아가리일세. 죽음은 머리로 물구나무를 서는 헤나로이고, 말을 하는 나야. 죽음은 자네와 자네의 그 공책이지. 죽음은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라고! 죽음은 이곳에 있으면서도 아예 없다네.
의료기술로 소생. 죽음은 단지 의식의 단절.
그건 정말로 말이 되네. 죽음에는 두 단계가 있거든. 첫 번째 단계는 의식의 단절이야. 그건 무의미한 단계이고, 메스칼리토를 먹었을 때 처음 오는 효과와 흡사하다네. 그때 사람은 가벼워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기쁨과 완전함과 세상 모든 것이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지. 하지만 그건 얕은 상태에 불과해. 그런 건 곧 사라지고 사람은 새로운 영역으로, 거칠고 힘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돌입하게 돼. 이 두 번째 단계는 메스칼리토와 진짜로 조우할 때와 같아. 죽음도 그것을 아주 닮았지. 첫 번째 단계는 얕은 느낌의 의식 단절 이지만, 두 번째 단계는 본인이 죽음과 만나는 진짜 단계라네. 그건 한순간에 불과해. 처음에는 의식을 잃지만 어떻게인지 몰라도 다시 정신을 차리는 거지. 죽음이 그 조용한 광포성과 힘으로 우리를 박살 내서 우리의 생명을 무無로 분해시켜버리는 건 바로 그때야.
죽음에 관해서 당신은 어떻게 그런 식으로 확연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맹우가 있거든. 작은 스모크는 나의 명백한 죽음을 아주 똑똑히 보여줬다네. 그래서 나는 개인적인 죽음에 관해서 밖에는 얘기할 수가 없다는 거야.
죽음은 언제나 무였던 거야. 무. 그건 자네 공책 갈피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작은 점이었어. 하지만 그건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자네 안으로 들어와서 자네를 확산시킬 거야. 자네를 편평하게 만들어서 하늘과 땅과 그 너머로까지 늘리는 거지. 그럼 자넨 조그만 결정들이 모인 안개 같은 것이 되어서 움직이면서 떠나가는 거야.
죽음은 복부를 통해 들어오네. 의지에 난 틈새를 곧바로 뚫고 들어오는 거지. 그곳은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부위야. 그건 의지의 부위이고, 그걸 통해 우리 모두가 죽는 그런 부위이기도 하지. 내가 그걸 아는 건 내 맹우가 그 단계까지 나를 안내해준 적이 있기 때문이라네. 주술사는 죽음에게 따라잡힘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조정하거든. 주술사가 편평해지고 확산하기 시작하면 그의 완전무결한 의지가 개입해서 안개를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조립해주는 거라네.
주술사를 조립해주는 건 그의 의지야. 하지만 나이를 먹고 몸이 쇠약해지면 그의 의지도 쇠퇴하고, 늦든 빠르든 간에 더 이상 자기 의지를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오네. 그러면 그가 자기 죽음의 소리없는 힘에 저항할 수단은 전무해지고, 그의 목숨은 다른 인간들의 목숨과 다르지 않게 되네. 본 모습을 잃고 자신의 경계 너머로 확산해가는 안개가 되는 거지.
주술사로 산다는 건 엄청난 짐이라네. 그러니까 <보는> 법을 배우는 편이 훨씬 낫다고 얘기했잖나. <볼> 줄 아는 사내는 모든 것이야. 거기 비하면 주술사는 애처로운 존재이지.
돈 후앙, 주술이란 뭡니까?
주술이란 어떤 핵심적인 결합점에다가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는 행위라네. 주술은 간섭이야. 주술사는 영향을 행사하고 싶은 것의 주요 결합점을 찾아내서 거기에다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지. 주술사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볼> 필요는 없어. 자기 의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만 알면 되거든.
#14
주술사는 지식을 향해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그런 힘들의 먹이가 된다네.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균형을 잡을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어. 의지 말일세. 따라서 주술사는 전사처럼 느끼고 행동해야 하는 거야. 다시 한 번 얘기해주겠네. 오직 전사만이 지식의 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주술사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은 전사로서 산다는 사실이 부여해주는 힘이야.
자네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건 나의 의무일세. 개인적으로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자네가 선택받았기 때문이지. 메스칼리토는 내 앞에서 자네를 지목했거든. 하지만 자네에게 전사처럼 느끼고 행동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어하는 건 내 개인적 욕구에서 비롯된 거라네. 전사가 된다는 건 그 무엇보다도 더 적절한 일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믿음이거든. 그래서 나는 이런 힘들을 주술사가 지각하는 방식으로 자네에게 보여주려고 애써왔던 거라네. 왜냐하면 사람은 그런 힘들의 무시무시한 충격을 받아봐야만 비로소 전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 전사가 아닌 상태에서 먼저 <보게> 된다면 자넨 약해질 거야. 그런 경험은 거짓 유순함을, 물러나고 싶은 욕망을 불러온다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그건 결국 육체의 쇠락으로 이어지지. 그래서 나는 자네가 그런 식으로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자네를 전사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거야.
자네가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하는 걸 지금까지 여러 번 들었는데, 난 그런 각오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런 건 아무 쓸모도 없는 자기도취거든. 전사는 단지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또 자네 부모가 자네에게 정신적 상처를 줬다고 말하는 것도 들은 적이 있는데, 인간의 정신이 아주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자네가 해롭다고 간주하는 그런 행위에 의해 상처받는 건 아냐. 난 자네 부모가 자네를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응석받이가 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실제로 자네에게 상처를 줬다고 믿는다네.
전사의 정신은 자기도취나 불평불만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고, 승패에도 연연하지 않아. 전사의 정신은 단지 투쟁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가 벌이는 모든 투쟁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전투라네. 그러니 전사에게 결과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전사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의 정신이 명료하면서도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도록 놓아둔다네. 그렇게 전투를 벌이면서 자기의지의 완전무결함을 자각하고 큰 웃음을 터뜨리는 거지.
이제 자네가 전사에 관해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점을 얘기해주겠네. 전사는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항목들을 선택해야 해.
일전에 맹우를 본 자네를 내가 두 번 씻어줘야 했을 때, 자네의 문제가 뭐였는지 아나?
모릅니다.
자넨 자네의 방패를 잃어버렸던 거라네.
방패라니요?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신 겁니까?
전사는 자신의 세계를 구성할 항목들을 선택한다고 했잖아. 그것도 신중하게 말이야. 왜냐하면 전사가 고르는 항목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가 이용하려고 분투하고 있는 힘들의 맹공격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방패가 되어주기 때문이라네. 이를테면 전사는 방패들을 써서 맹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일반인들 역시 전사와 마찬가지로 그런 불가해한 힘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자신들만의 특별한 방패들로 보호받기 때문에 그걸 아예 감지하지도 못하지.
그 방패라는 게 뭡니까?
사람들이 하는 일.
사람들이 뭘 하는데요?
흠, 주위를 둘러보면 자네도 깨달을 거야. 사람들은 사람이 하는 일들로 바쁘다는 걸. 그것이 그들의 방패가 되어주는 걸세. 주술사의 틈새는 아까 말한 불가해하고 완강한 힘들 중 하나와 마주칠 때마다 벌어지고, 그러면 평소보다 더 죽음 앞에 취약해진다네. 우리가 그런 틈새를 통해 죽는다는 얘기는 했었지. 따라서 틈새가 열리면 그걸 자기 의지로써 메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전사라면 말이야. 만약 자네처럼 전사가 아닌 경우에는 일상생활의 활동을 이용해서 그 같은 조우의 공포로부터 마음을 멀어지게 함으로써 그 틈새가 절로 닫히게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네. 자네가 맹우를 만났던 그날 자넨 나한테 화를 냈었지. 내가 자네 차를 멈추거나 자네를 물에 처박아서 추위에 떨게 만들었을 때 나는 일부러 자네를 화나게 했던 거야. 옷을 입은 채로 젖으니 더 추웠겠지.화가 나고 추웠기 때문에 자넨 틈새를 닫고 안전해질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자네 삶의 이 시점에서는 자넨 더 이상 그런 방패를 보통 사람들만큼 효과적으로 쓰지 못해. 자넨 그런 힘들에 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마침내 전사처럼 느끼고 행동하기 직전의 상태까지 왔으니까 말이야. 자네의 옛날 방패들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게 된 거라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사처럼 행동하고 자네 세계의 항목들을 골라야 해. 이젠 아무거나 되는대로 끌어모아서 주위를 에워쌀 수는 없어. 이건 정말로 심각한 얘기야. 자신이 난생처음으로 옛 생활방식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해.
저의 세계의 항목들을 선택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전사가 그런 불가해하고 완강한 힘들과 마주치는 건, 일부러 그런 것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이야. 그래서 언제나 그런 만남에 대비되어 있지. 반면에 자네는 전혀 그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실제로 그런 힘들이 찾아오면 자네는 소스라치게 놀랄 게 뻔해. 그 공포는 자네의 틈새를 열 거고, 자네 목숨은 불가항력적으로 거길 통해 빠져나가게 될 거야. 그러니까 자네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대비태세를 갖추는 거야. 언제든 맹우가 눈앞에 불쑥 튀어나올 수 있다고 상정하고 그럴 경우에 대비하는 거지. 맹우를 만난다는 건 애들 장난이 아니고, 전사는 자신의 목숨을 지킬 책임이 있어. 그러다가 그런 힘들 중 하나가 자네를 건드려서 자네의 틈새를 연다면, 자넨 스스로 그걸 닫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에게 큰 평화와 기쁨을 주는 일들을 몇 가지 골라둬야 한다네. 공포로부터 마음을 돌리게 해서 자네의 틈새를 닫고 자네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들을 말이야.
이를테면 어떤 걸 얘기하시는 겁니까?
몇 년 전에 전사는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깃든 길을 택해서 따라 간다고 자네에게 말해준 적이 있지. 전사가 일반인과 다른 건 언제나 마음이 깃든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라네. 자신이 선택한 길과 하나가 될 때, 또 그 길을 따라가면서 크나큰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때 전사는 그것이 마음이 깃든 길임을 깨닫는 거지.
하지만 방금 저는 전사가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마음이 깃든 길을 선택할 수 있죠?
지금이 전환점이야. 예전에는 정말로 전사처럼 살 필요가 없었다고 해두지.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어. 이제 자네 마음이 깃든 길의 항목들로 자신을 에워싸고, 나머지는 거부해야만 하네. 안 그러면 다음에 맹우와 마주친다면 자넨 파멸이야. 첨언하자면, 자넨 더 이상 맹우와의 만남을 일부러 요청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맹우는 자네가 자고 있을 때 올 수 도 있고, 친구들과 대화하는 중에도 올 수 있고, 글을 쓰는 중에도 올 수 있거든.
몇 년 동안 줄곧 당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려고 진심으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던 건 분명해 보이는군요. 그런데 지금 와서 어떻게 더 잘할 수 있겠습니까?
자넨 생각과 말이 너무 많아.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짓을 멈춰야 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딱히 자네만 그런다는 건 아냐. 우린 모두가 늘 속으로 독백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잘 생각해보게. 혼자 있을 때 자넨 뭘 하나?
자신과 얘기합니다.
자기 자신과 무슨 얘기를 하는데?
글쎄요. 그때그때 생각나는 거라면 뭐든 얘기할 수 있겠죠.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지를 가르쳐주지. 우린 우리의 세계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네. 사실, 우리는 그런 식의 내적 독백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를 유지시켜가는 거야.
어떻게요?
자신에게 얘기하기를 그칠 때마다 세계는 언제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네. 우리가 그것을 새롭게 하고, 거기에 생명의 불을 붙이고, 내적 독백으로써 그것을 지탱하는 거지. 그뿐 아니라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얘기를 하는 동안에 자신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죽는 날까지 계속 똑같은 선택을 되풀이하는 거야. 왜냐하면 우린 죽는 날까지 계속 똑같은 마음속의 독백을 되풀이하거든.
전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고로 그 얘기를 멈추기 위해 노력한다네. 자네가 전사처럼 살고 싶다면 반드시 알아야 할 마지막 사항이야.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에게 얘기하기를 멈출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우선 귀를 써서 눈의 부담을 좀 덜어줘야 해. 우리는 태어난 이래로 줄곧 눈을 써서 세계를 판단해왔어.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하는 얘기도 주로 우리가 본 것에 관한 것이고, 전사는 그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에 세계에 귀를 기울인다네.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거지.
전사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을 멈추는 즉시 세계가 변화할 것임을 알고 있네. 그리고 그 엄청난 충격에 대비하고 있어야만 하지.
돈 후앙,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세계가 이렇고 그런 것은 단지 세계가 모름지기 그런 식이라고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세계란 그렇다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기를 그만두면 세계도 그렇게 존재하기를 멈추지. 지금으로선 자네가 그런 경천동지할 충격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으니, 자넨 우선 천천히 세계를 풀어헤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해.
무슨 얘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자네의 문제는 세계와 인간이 하는 일을 혼동한다는 점이야. 이 역시 자네 혼자만 그러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지. 인간이 하는 일들은 우리를 둘러싼 힘들을 막아주는 방패라네. 우리가 인간으로서 하는 일은 우리에게 위안과 안심감을 주거든. 그러니 인간이 하는 일은 중요해. 그것이 방패라서 중요한 것일 뿐이지만 말이야. 우린 자신이 인간으로서 하는 일들이 방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꿈에도 깨닫지 못한 채 그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거라네. 사실, 인류 입장에서는 인간이 하는 일 쪽이 세계 그 자체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
무엇을 두고 세계라고 하시는 겁니까?
세계란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들이라네.
생명, 죽음, 인간, 맹우들, 그리고 우리를 에워싼 그 밖의 모든 것들 말이야, 세계는 이해가 불가능해. 우리는 결코 그걸 이해할 수 없을 걸세. 세계는 결코 그 비밀을 드러내지 않을 거야. 그러니 우리는 그걸 있는 그대로 대해야만 하네. 순수한 신비로서 말이야!
하지만 범부는 그러지 않지. 그런 사람에게 세계란 결코 신비가 아니고, 늙으면 더 이상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다고 그가 믿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야. 노인은 세계를 다 산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일들을 다 한 것일 뿐이네. 그런데도 그는 멍청한 혼란에 빠져서 자신에게 세계는 더 이상 신비롭지 않다고 믿어버리는 거지. 기껏 방패를 얻을 목적으로 그런 비참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니!
전사는 이런 혼란을 자각하고 사물을 적절하게 다루는 법을 터득한다네. 그 어떤 조건하에서도 인간이 하는 일이 세계 자체보다 중요할 수는 없어. 따라서 전사는 세계를 끝없는 신비로 대하고 인간이 하는 일을 끝없는 우행으로 간주하는 거라네.
#15
온몸에 묘한 느낌이 끓어오르면서 ‘힘power’이 밖으로 새나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이 비전을 지우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 뇌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마음이 깃든 길’의 항목들이 방패가 되어준다는 돈 후앙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내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흥미진진한 열정의 대상, 나를 크나큰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주는 일이. 나는 맹우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맹우의 얼굴 전체가 보이기 전에 아무 문제 없이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주술사에게는 모든 것이 의미를 갖고 있어. 소리에는 구멍이 나있고, 자네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야. 보통 사람들은 그런 구멍들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못 내기 때문에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그냥 살아가야 해. 벌레든 새든 나무든 간에 살아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얘기를 해줄 수 있다네. 우리의 속도가 그들의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을 만큼 빠르기만 하다면 말이야. 스모크는 우리가 그런 속도를 낼 수 있게 해준다네. 하지만 우리는 이 세계에 사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해. 그래서 곧 죽이려고 하는 식물에게 말을 걸어, 잘라서 미안하다고 빌어야 하는 거라네. 우리가 사냥할 동물들 역시 마찬가지야. 반드시 필요한 것들만 잡아야 하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가 죽인 식물과 동물과 벌레들이 우리를 적대시해서 질병과 불운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지. 전사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최대한 달래주려고 한다네. 그래야지 구멍을 통해 볼 때 나무와 새와 벌레들이 진실한 얘기를 해주거든.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자네가 맹우를 봤다는 사실이야. 그게 자네가 할 일이야! 우리가 뭔가를 사냥하러 갈 거라는 얘긴 했지. 난 그게 동물일 거라고 생각했네. 자네가 동물을 목격하고, 그걸 함께 사냥해야 할 거라고 말이야. 내 경우는 멧돼지를 보았지. 내 점령 포획기도 멧돼지야.
그 정령 포획기를 멧돼지로 만들었다는 겁니까?
아냐! 주술사의 삶에서는 그 어떤 것도 그것 아닌 다른 무엇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아. ‘어떤 것’이 있다면 그건 그것 자체일 뿐이라네. 자네가 멧돼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내 정령 포획기도 멧돼지라는 것을 깨달았을 거야.
우리는 왜 사냥을 하러 여기에 온 겁니까?
맹우가 자기 자루에서 꺼낸 정령 포획기를 보여줬으니까. 그를 불러내려면 자네도 그런 것이 하나 있어야 해.
정령 포획기가 뭡니까?
끈이야. 그걸 쓰면 나는 다른 맹우들이나 나 자신의 맹우를 불러낼 수 있고, 물웅덩이의 정령들, 강의 정령들, 산의 정령들도 불러낼 수 있다네. 내 것은 멧돼지이고 멧돼지처럼 울어. 자네를 돕기 위해서 자네 주위에서 두 번 그걸 써서 물의 정령을 불러냈지. 그 정령도 오늘 맹우가 왔을 때처럼 자네에게 왔었지. 자넨 충분한 속도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걸 못 봤지만. 하지만 협곡으로 자네를 데려가서 바위 위에 눕게 했던 날 자네는 정령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어도 정령이 자네를 위에서 거의 덮치다시피 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런 정령들은 조력가라네. 다루기 힘들고 좀 위험하긴 하지만 말이야. 그것들을 누르려면 완전무결한 의지가 있어야 해.
#16
선물을 줄 수 있는 종류의 정령. 진정한 맹우이며 비밀을 가르쳐주는 존재이다.
이 특수한 종류는 외지고 인적이 없는, 거의 접근이 불가능한 장소에 존재한다고 한다. 그런 존재를 찾아내고 싶은 사람은 먼 곳까지 직접 여행해야 하며, 외진 곳에 도착한 뒤에는 혼자서 모든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있다가 예의 그림자를 목격하면 즉각 그 자리를 떠나야 하지만, 그 이외의 상황과 마주칠 경우에는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모닥불을 꺼버리고, 다시 불을 붙이려는 시도를 네 번 잇달아 방해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상황에 해당한다. 근처에 있는 나무에서 가지가 부러지는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단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러졌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돈 후앙은 말했다.
그밖에는 바위가 굴러오거나 모닥불을 향해 자갈이 날아오는 경우, 혹은 어떤 식으로든 지속적인 소움이 들려오는 상황에 유념할 필요가 있었다. 그럴 경우에는 정령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런 현상이 일어난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 존재가 전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소름 끼치는 모습을 하고 느닷없이 그의 앞으로 튀어나오거나, 뒤에서 그를 꽉 껴안고 몇 시간 동안이나 그 자리에 못 박아둘 때도 있다고 했다. 전사 위로 나무를 쓰러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돈 후앙은 그런 존재는 정말로 위험한 힘이며, 직접적인 수단을 써서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지만 공포로 죽게 하거나, 사람 위로 실제로 어떤 물건이 떨어지게 하거나, 사람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 발을 헛디디게 함으로써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만약 내가 부적절한 상황에서 그런 존재와 마주쳤다가 저항하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내 영혼을 앗아갈 수조차 있기 때문에 단지 지면에 몸을 던진 채 아침까지 참는 수밖에 없다고 돈 후앙은 강조했다.
비밀을 가르쳐주는 존재인 맹우와 대면하는 사람은 모든 용기를 쥐어짜서 맹우 쪽에서 자신을 부여잡기 전에 먼저 부여잡고, 맹우 쪽에서 쫓아오기 전에 먼저 쫓아가야 하네. 쫓아갈 때는 가차 없이 쫓아가야 하고, 그런 다음 대결하는 거지. 맹우를 부여잡고 땅에 쓰러뜨린 다음 그쪽에서 자네에게 능력을 선사해줄 때까지 꼼짝도 못하게 붙들고 있는 거야.
당연히 실제를 갖고 있지.
그것들과 씨름할 때는 단단한 느낌이 오거든. 하지만 그런 느낌은 순간적이야. 그 존재들은 인간의 공포에 의존한다네. 따라서 씨름 상대가 전사라면 그 존재는 금세 압력을 잃어버리고 전사는 되려 활력을 얻게 되지. 전사는 정령의 압력을 실제로 흡수할 수 있다는 뜻이야.
어떤 종류의 압력을 말하는 겁니까?
능력. 그것을 만지면 마치 당장에라도 이쪽을 갈가리 찢어놓을 것처럼 격렬하게 진동하지만 그건 쇼에 불과해. 사람이 계속 부여잡고 있으면 그것은 압력을 잃어버린다네.
압력을 잃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공기 같아지는 건가요?
아니. 그냥 축 늘어져. 여전히 실체는 남아 있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건 그 어떤 감촉과도 다른 느낌이야.
원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방법은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낯설고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돈 후앙이 나에게, 나는 늘 일의 시작부터 알아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버릇이 있다고 지적했던 것이 생각났다. 시작 따위는 애당초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산속에서 마침내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다. 출발점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17
자네의 마음은 단지 일의 한쪽 면만 찾아보도록 고정되어 있어.
그는 지면에 여덟 개의 점을 찍었다. 그런 다음 첫 번째 점을 원으로 에워쌌다.
자넨 여기 있어. 우리들 모두가 여기 있지. 이건 감정이고, 우리는 여기서 여기로 움직이네.
그는 첫 번째 점 바로 위에 있는 점을 원으로 에워쌌다. 그런 다음 이 두 점 사이로 잔가지를 왕복시키며 왕래가 빈번함을 묘사했다.
하지만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점은 여섯 개가 더 있다네. 대다수의 인간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지만 말이야.
돈 후앙은 첫 번째 점과 두 번째 점 사이를 잔가지로 쿡쿡 찔렀다.
이 두 점 사이를 움직이는 걸 자네는 이해라고 부르네. 지금까지 자네가 살아오면서 줄곧 해왔던 일이지. 자네가 내 지식을 이해한다고 말하더라도 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는 뜻이야.
그런 다음 그는 여덟 개의 점의 일부와 다른 점들을 선으로 이었다. 그 결과 대칭적이지 않은 선들로 이어진 여덟 개의 중심을 가진 길쭉한 사다리꼴이 만들어졌다.
나머지 여섯 개의 점들은 각각 하나의 세계라네. 감정과 이해가 자네에게 두 개의 세계인 것처럼 말이야.
왜 여덟 개밖에 없는 겁니까? 원의 경우처럼 무한한 수가 있을 수가 있지 않습니끼?
내 지식이 미치는 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점은 여덟 개밖에 없다네. 아마 인간은 그 너머로는 못 가는 건지도 몰라. 그리고 난 지금 이해하는 게 아니라 다룬다고 했네. 그 점을 명심했나?
자네 문제는 모든 걸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이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자네가 끝끝내 이해하기를 고집한다면 자넨 인간으로서의 운명 전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얘기가 되네. 장애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지. 따라서 자넨 몇 년을 거의 허송세월한 거나 마찬가지야. 완전한 잠에서 깨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어차피 다른 상황을 통해서도 성취할 수 있었던 일이니까 말이야.
자넨 사슬에 묶여 있어!
자네 이성의 사슬에 묶여 있는 거야.
이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네. 이해는 작은 부분에 불과해. 그것도 극히 사소한.
그는 사람은 오로지 행동을 통해서만 주술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게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일을 완전히 그만둘 작정이라고 말했다.
자네는 나아가는 방향을 바꿔야 해. 그럼으로써 자네를 묶고 있는 사슬을 끊으란 말일세.
돈 후앙은 자신이나 돈 헤나로의 행동에서 이해할 것은 전무하며, 주술사라면 경탄할 만한 이적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헤나로하고 나는 여기서 행동하네.
그는 이렇게 말하며 그가 그린 도표의 중심 하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여긴 이해의 중심이 아냐. 그래도 자넨 이게 뭔지를 알아.
#에필로그
자네가 돌아오든 말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는 전사처럼 살아갈 필요가 있네. 자네도 줄곧 알고는 있었겠지만, 이제는 지금까지 무시해왔던 걸 활용하는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했어. 그렇지만 자네는 이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해. 그건 그냥 주어지는 것도, 건네 받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자기 내부에서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자넨 아직도 빛을 발하는 존재에 불과해.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죽어야 한다는 얘기야. 예전에 빛나는 달걀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를 자네에게 한 적이 있지.
자네 안에서 정말로 변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초인수업>
머리말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그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암묵적인 일관성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관성은 나를 정말로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묘하게 기쁜 동시에 묘하게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단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의 행동규범을 철저하게 재검토할 것을 강요당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약하고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생물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돈 후앙은 약하거나 무력한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단지 그와 함께 있기만 해도 그와 나의 행동방식 사이에 존재하는 우열을 뚜렷이 자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그가 내게 했던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우리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에 관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넨 자기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군.” 그는 이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그래서 그렇게 묘한 피로감에 시달리는 거야. 자네가 주위 세계를 차단하고 자기 논리에만 매달리는 건 바로 그 탓일세. 그래서 자네한테 남는 건 고민밖에는 없어. 나도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지만, 자네가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야.”
“어떻게 다르다는 겁니까?”
“난 모든 고민을 타파했다네. 내가 원하는 걸 모두 움켜잡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는 게 유감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냥 안타깝다는 얘기였어.”
나는 돈 후앙의 이런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절망감이나 자기연민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페요테, 짐슨위드, 실로시베 속에 포함된 버섯.
세 식물 중 하나를 섭취함으로써 유발되는 의식상태들은 환각이 아니며, 평범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의 명확한 국면들이라는 지적이야말로 돈 후앙의 신념체계의 대전제였기 때문이다. 돈 후앙은 이런 비일상적 현실상태들을 마치 ‘현실인 것처럼’ 대한 것이 아니라 ‘진짜 현실로’ 대했다.
돈 후앙은 이 식물들을 인간을 모종의 비인격적인 힘 내지는 ‘주력呪力’으로 안내하거나 이끄는 운반수단으로 간주했고, 또 이 식물들이 유발하는 여러 상태를 이 ‘주력’에 대한 통제력을 얻기 위해 주술사가 거쳐야 하는 ‘만남’으로서 이해하고 설명했다.
그는 페요테를 ‘메스칼리토’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자애로운 스승이자 인간의 수호자라고 설명했다. 메스칼리토는 ‘올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친다.
“자네가 겁에 질려서 배우기를 그만둔 건 자기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야.”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자네를 둔중하고 어설프고 허영에 찬 존재로 만든다네. 식자가 되고 싶거든 경쾌하고 유연해져야 해.”
이 두 번째 도제수업 주기를 통틀어 돈 후앙이 특히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내게 ‘보는see’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의 지식체계에서 ‘보기seeing’와 ‘바라보기looking’가 서로 뚜렷하게 다른 의미를 갖는 지각방식으로 구분된다는 점은 명백했다. 이 경우 ‘바라보기’란 우리가 외부세계를 지각하는 일상적인 방식을 가리키지만, ‘보기’는 식자가 세계의 이른바 ‘본질’을 인지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의미한다.
“순식간에 흘러가는 그 세계를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필요한 민첩성을 자네에게 줄 수 있는건 스모크밖에 없다네.”
제1부 ‘보기’ 준비
#1
“언젠가는 자네도 타인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고, 그럼 인간을 변화시키는 방법 따위는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걸세.”
“인간을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보게> 되면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네. 작은 스모크의 도움을 받으면 인간을 빛의 섬유로 <볼> 수 있지.”
“빛의 섬유라고요?”
“그래. 흰 거미줄을 닮은 섬유. 머리에서 배꼽까지 순환하는 아주 가느다란 실들이네. 그래서 인간은 순환하는 실들로 이루어진 달걀같다는 거야. 팔다리의 경우는 빛을 내면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빳빳한 털처럼 보인다네.”
“모든 인간이 그렇게 보인단 말입니까?”
“그래. 게다가 모든 인간은 다른 만물과 맞닿아 있네. 손이 닿는다는 게 아니라, 배 한복판에서 튀어나온 긴 실 뭉텅이를 통해 외부와 이어져 있다는 뜻이네. 이 실 뭉텅이는 인간을 주위 환경과 연결해줌으로써 우리의 균형을 유지하고 안정시켜준다네. 그러니까 언젠가는 자네도 <보고> 깨달을지도 모르겠군. 왕이든 거지든 인간은 반짝이는 달걀이고, 뭔가를 변화시킬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자넨 그런 반짝이는 달걀에서 뭘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도대체 뭘?”
#2
기록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숙련된 주술사라면 단지 ‘사회적 단서clue’를 조작함으로써’ 지극히 특수한 지각영역을 유도해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조작적 절차의 성질에 관한 나의 가설은 특정한 지각영역을 유도해낼 수 있는 지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필수 전제로 한다.
“어둠을 어디에 쓸 수 있다는 겁니까?”
돈 후앙은 어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낮의 어둠’- 은 <보기>위해서는 최상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자네도 몇 번이나 미토테(페요테 집회)에 참가해봤잖아. 뭘 느껴야 하는지, 또 뭘 해야 하는지 자네에게 얘기해주는 것은 오직 메스칼리토밖에는 없다는 걸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난 자네가 왜 왔는지 아네.”
“하지만 단서 부여 체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네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군.”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메스칼리토와 만났다는 사실에 관해 달리 어떻게 동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동의하는건 <봤기> 때문이야.”
나는 그가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돈 비센테는 정말로 아름다운 인물이었다. 섬약하기 그지없지만, 묘하게 영적인 그의 두 눈은 마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돈 후앙에게 그토록 아름다운 인물이 어떻게 위험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보는>법을 터득하면 어떤 이점이 있습니까?
분간할 수 있네. 어떤 사물이든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거든.
맹우는 스모크 안에 있는 게 아냐. 스모크는 맹우가 있는 곳으로 자네를 데려가 주고, 자네가 일단 맹우와 하나가 되고 나면 다시는 스모크를 피우지 않아도 돼. 그 시점부터 자넨 맹우를 마음대로 불러내서 뭐든 원하는 일을 시킬 수 있으니까 말이야.
맹우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주술사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쓰는 힘일세. 내가 작은 스모크를 맹우로 선호하는 건 그것이 나한테 많은 걸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야. 스모크는 언제나 한결같고, 공정하다네.
돈 후앙, 맹우는 당신에게 어떻게 보입니까? 예를 들어 제가 본 세 사람, 제 눈에는 보통 인간처럼 보였던 존재들 말입니다. 당신이 봤으면 어떻게 보였을까요?
보통 인간처럼 보였겠지
그럼 진짜 인간하고 어떻게 구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진짜 인간을 <보면> 빛을 발하는 달걀처럼 보이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자들은 언제나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맹우를 <볼> 수 없다고 한 건 바로 그런 뜻에서였다네. 맹우들은 제각기 원하는 형상을 취한다네. 개나 코요테처럼 보일 때도 있고, 땅 위를 굴러다니는 마른 풀 뭉치처럼 모일 때조차 있어. 그 밖의 어떤 형상으로도 말이야.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들을 <볼> 경우, 그것들이 가장한 모습 그대로 보인다는 점이야. 자네가 <볼> 수 있다면, 모든 사물은 독자적인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인간이 달걀처럼 보이고, 다른 존재들은 뭔가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맹우의 경우는 오로지 그들이 보여주는 형상으로만 볼 수 있어. 눈을 속이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인간의 눈 말일세. 하지만 개는 절대 속지 않아. 까마귀도 마찬가지고.
왜 그들은 우리를 속이려고 하는 겁니까?
난 우리 모두가 어릿광대라고 생각하네. 자기 자신을 속이잖나. 맹우들은 근처에 있는 아무것이나 골라서 그 외형을 두르고, 우리는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식이지. 우리가 단지 사물만을 바라보도록 스스로의 눈을 훈련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냐.
돈 후앙, 저는 그들의 역할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세계에서 맹우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그건 우리 인간이 이 세계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똑같아. 나도 정말 모르네. 우린 단지 이곳에 존재할 뿐이잖나. 그리고 맹우들도 우리처럼 여기에 존재할 뿐이야. 어쩌면 우리보다 더 먼저 와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더 먼저 와 있었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인간이 언제나 이곳에 있었던 건 아니라네.
돈 후앙은 그에게는 단 하나의 세계, 그가 발을 디디고 있는 장소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 인간이 언제나 이 세계에서 살았던 게 아니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건 간단해. 우리 인간은 이 세계에 관해 거의 아는 게 없거든. 코요테는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야. 코요테는 세계의 겉모습에 속는 일이 거의 없지.
코요테는 맹우를 <볼> 수 있습니까?
물론이네.
돈 후앙은 맹우는 무슨 일에든 먼저 나서거나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해서만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맹우는 인간의 최악의 면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에 맹우와 접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그런 만남의 충격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거둬내서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고, 바로 그런 연유로 도제수업은 그토록 길고 고된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3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미토테는 내가 고안한 이론적 얼개를 확증하기 위한 최상의 기회였다. 우선 나는 그런 집회의 참가자들 사이에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암묵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멕시코로 오겠다고 결심한 이상, 그런 시시콜콜한 두려움 따위는 모두 내버려야 해.
오겠다고 결심했을 때 진작에 그랬어야 했어. 자네가 여기에 온 건, 오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게 전사의 방식이야. 몇 번이고 얘기했듯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는 방법이란 전사처럼 사는 것이라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오만 가지 생각에 싸여 고민을 해도 무방하지만, 일단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모든 고민과 생각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자네만의 길을 가란 말일세. 그 뒤에도 자네가 내려야 할 결정은 무수히 많아. 그게 바로 전사의 길이라네.
상황이 불확실해지면 전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네.
우리의 정신을 단련시켜주는 건 오직 죽음에 대한 생각밖에는 없다네.
저것들은 죽음의 얼굴에 달린 불빛이라네. 죽음은 그걸 모자처럼 쓴 다음 질주해오지. 저것들은 우리 뒤에서 달려오는 죽음의 불빛이거든. 게다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죽음은 결코 멈춰 서는 법이 없네. 가끔 저렇게 불을 끌 뿐이야.
#4
페요테가 이 모든 걸 어떤 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 사람은 평생을 노새처럼 일만 하면서 살 운명인 것 같은데요.
메스칼리토는 모든 걸 변화시킨다네.
그래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노새처럼 일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야. 내가 메스칼리토 안에 정령이 있다고 한 건 그가 인간을 변화시키는 정령 같은 것이기 때문이야. 눈에 보이고, 만질 수도 있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정령이지. 때로 그게 우리 의지에 반할 때조차도 말이야.
그는 우리에게 올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친다네.
그를 아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지켜주지. 자네들이 살아가는 삶은 삶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야. 만사를 의도적으로 하면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이 뭔지를 전혀 모르니까 말이야. 수호자가 없으니까!
진짜 수호자라면 억지로라도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법이라네.
메스칼리토가 자네들의 수호자가 된다면 싫든 좋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어. 눈으로 볼 수 있으니, 그가 하는 말을 따라야 하는 거지. 메스칼리토는 자네들이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접하게끔 만들 거야. 자네들이 수호자들에게 접근하는 방식과는 딴판이지.
수호자를 찾으려 한다면 인생이 달라지겠지. 정확히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달라질 거라는 점은 확실해.
루시오는 테킬라 말고도 자기 삶을 만족시켜줄 뭔가 다른 걸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 다른 것이 뭐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수호자는 그걸 제공해줄 가능성이 있어.
우리가 아는 일이 얼마나 적고,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안다면 자네들도 이해할 거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술이야. 술은 심상을 흐릿하게 만들지. 반면에 메스칼리토는 모든 것이 명료해지게 해준다네. 너무나도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야. 너무나도!
어떻게 페요테가 그런 일들을 다 한단 말입니까?
우선 그와 아는 사이가 되어야 하네.
내가 보기엔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야. 그런 다음엔 그에게 바쳐져야 하지. 정말로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여러 번 만나야해.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전적으로 자네에게 달렸네. 두려움 없이 그에게 다가가면 그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조금씩 가르쳐줄 거야.
그걸 말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해. 왜냐하면 그건 사람마다 다르게 때문이지.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메스칼리토는 각자에게 은밀하게 자신의 비밀을 밝혀준다는 사실뿐이라네.
#5
그 어떤 일에도 상관하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건 자네한테나 해당하는 일이야. 자넨 온갖 일들에 다 애착을 갖고 있으니까 말이야. 자넨 내게 통제된 우행이 뭔지를 물었고, 난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관련해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통제된 우행이라고 대답했네. 왜냐하면 내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거든.
자네가 인생의 어떤 부분들에 연연하는 건 그것들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네. 자네에게 자네의 행동은 확실히 중요하겠지. 하지만 나의 경우엔 그 어떤 일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네. 내가 하는 행동도, 다른 인간들이 하는 그 어떤 행동도 말이야. 하지만 내가 계속 살아가는 건 내게 의지가 있기 때문이야. 나는 평생 동안 나의 의지를 단련해왔네. 그것이 정돈되고 완전해져서 내겐 그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수준에 이를 때까지 말이야. 바로 그 의지가 내 삶의 우행을 통제하고 있는 거야.
일단 <보는>법을 터득한 사내는 자신이 우행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네.
자네의 행동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들의 행동이 자네 눈에 중요하게 비치는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배운>탓이야.
우린 모든 것에 대해 생각을 하도록 배운다네. 그래서 우린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눈이 그것을 바라보도록 훈련시키지. 우리는 자신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이미 하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 그러니 자신이 중요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거야! 하지만 <보는>법을 배운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이 바라보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그리고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없으면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거야.
예컨대 어떤 사람이 <보는>법을 배우면 온 세계의 모든 것이 무가치해지는 겁니까?
무가치해진다고는 안 했어. 중요하지 않다고 했을 뿐이야. 모든 것이 동등해지고, 따라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거야. 이를테면 나는 결코 내 행동이 자네의 행동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고, 어떤 일이 다른 일보다 더 본질적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아. 따라서 모든 것은 평등해지고, 바로 그 평등함에 의해서 그 중요성을 잃는 거지.
웃기 위해서는 눈을 써서 바라보아야 한다네. 우리는 오직 사물을 바라봄으로써만 우리 세계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지. 반면에 눈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평등해지기 때문에 그 무엇도 우습지 않지.
그렇다면 돈 후앙, <보는> 사람은 아예 웃지도 못한다는 뜻입니까?
아마 결코 웃지 않는 식자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식자와 마주친 것은 없지만 말이야. 내가 아는 식자들은 다들 <보는> 동시에 바라보기 때문에, 웃을 줄 알아.
모든 것이 그토록 평등하다면, 논리적으로 죽음을 선택해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많은 식자가 바로 그런 선택을 하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식으로 말이야. 그럼 사람들은 그가 그의 소행에 앙심을 품은 누군가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하곤 하지. 하지만 그들이 죽음을 선택한건 그러든 말든 상관이 없기 때문이야. 반면에 나는 살아가고 웃는 쪽을 선택했네. 그쪽이 중요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 성향이 그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야. 내가 선택한다고 말하는 건 <보기>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는 쪽을 선택했다는 뜻은 아냐. 내가 뭘 <보든>간에, 내 의지가 나로 하여금 살아가게 만드는 거야.
지금 자네가 나를 이해 못하는 건 바라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되는 대로 생각하는 습관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은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예외 없이 가지고 있는 통념을 뜻하며, <보기>는 그 습관을 제거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보는> 법을 터득하기 전까지는 그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돈 후앙,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면 제가 <보는> 법을 터득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좋든 나쁘든 간에 사람은 배우기 위해 사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나. 나는 <보는> 법을 배웠고,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네. 그리고 이번에는 자네가 그럴 차례야. 언젠가는 자네도 <보고>, 그럼으로써 뭐가 중요한지 안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될지도 몰라. 나에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지만, 자네에겐 모든 것이 중요할 지도 모르지. 식자는 행동하며 살지, 행동에 관해 생각하거나 행동을 마친 뒤에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할지를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는다는 걸 자네도 이젠 알잖나. 식자는 마음이 깃든 길을 골라서 그걸 따라 가네. 식자는 주위를 바라보고 기뻐하며 웃음을 터뜨리다가, <보고> 아는 거야. 식자는 자기 삶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리라는 사실을 아네. 식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디에도 안 간다는 걸 알고 있어. 식자는 <보고> 알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중요한 것 따윈 없다는 걸 알아. 바꿔 말해서 식자에게는 명예도, 존엄성도, 가족도, 이름도, 나라도 없고, 단지 살아가야 할 삶만이 존재할 뿐이라네. 그리고 이런 상황하에서 다른 인간들과 식자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은 통제된 우행밖에는 없어. 그런 연유로 식자는 노력하고, 땀을 흘리고, 헐떡인다네. 겉보기에는 보통 사람과 하등 다르지 않지. 그의 삶의 우행이 통제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야. 다른 것보다 중요한 것 따윈 없는데도, 어떤 행위를 선택해서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야. 통제된 우행은 식자로 하여금 자기가 하는 행동은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말하게 하고,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 그래서 그는 그런 행동을 끝마친 뒤에 평온하게 물러서지. 자기가 한 행동이 선하든 선하지 않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본인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네.
반면에 식자는 완전히 무감동해지는 쪽을 택하고 아예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도 있어. 마치 무감동한 것이 본인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인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그럴 경우도 역시 진실이라네. 그게 바로 그의 통제된 우행이기 때문이지.
자넨 자기 행동에 관해 생각을 해. 그래서 자네는 그 행동이 자네가 생각하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믿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야. 실제로는 인간의 그 어떤 행동도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말이야. 전혀! 하지만 자넨 내게 물었지. 그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계속 살아갈 수 있느냐고. 차라리 죽는 쪽이 더 쉽지 않느냐고. 그게 바로 자네가 말하고 믿고 있는 것이야. 왜냐하면 자네는 삶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지금 자네가 <보는> 것이란 어떤 것일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일세. 방금 자넨 그것에 관한 생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나한테 그걸 설명해달라고 한거야. 평소 자네가 늘 하던 방식으로 말이야. 하지만 <보기>의 경우는 생각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에 난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자네에게 설명해줄 수가 없다네. 자넨 내가 왜 통제된 우행을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것 같은데, 통제된 우행은 <보기>와 아주 닮았다는 얘기밖에는 해줄 수가 없군. 그건 생각해서 이해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
자네는 너무 오래 여길 떠나 있었던 것 같군. 자넨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정말로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설령 식자가 된다 해도 방금 얘기한 그 노인처럼 공허해지고,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느낌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가 않아.
자네 친구가 고독한 건 <보는> 걸 모르고 죽어야 하기 때문이야. 그는 살아오면서 단지 나이를 먹기만 했고, 자기연민이 쌓인 탓에 본인도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 처지가 된 걸세. 승리를 좇았지만 단지 패배밖에는 못 겪었기 때문에 40년을 허비했다고 느끼는 거지. 승리와 패배는 똑같은 거라는 사실을 그가 아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그런데 자넨 자네가 다른 모든 것과 동등하다고 하니까 내가 두려워졌다, 이건가? 그건 어린애 같은 태도야. 인간이란 배우기 위해 사는 것이고, 전쟁에 임한 것처럼 지식을 향해 전진해야만 하네. 이 얘기는 이미 수도 없이 했을 텐데. 지식이나 전쟁에 임할 때는 두려움과 존경심, 그리고 자신이 전쟁에 임한다는 자각과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해. 내가 아니라 자네 자신을 신뢰하란 말일세.
그러니까 자넨 그 친구의 삶의 공허함이 두려운 거로군. 하지만 식자의 삶에는 공허함이란 없다네. 정반대야. 모든 것이 철철 넘칠 정도로 가득 차 있거든.
모든 게 넘치도록 가득 차 있어.
그리고 모든 것이 동등해. 난 그저 나이만 먹은 자네 친구와는 달라. 내가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한 건 자네 친구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뜻으로 한 말이야. 그 친구가 그렇게 힘들여 투쟁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실토한 건 그가 패배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내겐 승리도, 패배도, 공허함도 없네. 모든 것이 넘치도록 가득하고, 모든 것은 동등하고, 내 삶은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었어.
식자가 되려면 전사처럼 행동해야지, 칭얼거리는 어린애처럼 굴어서는 안 되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고, 위축되지도 않고 노력하는 거야. 직접 <보고>,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나는 통제된 우행이란 식자가 된 이상 그 누구도 좋아할 수 없다는 뜻인지 물어봤다.
자넨 누구를 좋아한다, 싫어한다 하는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군. 식자는 단지 좋아할 뿐이라네. 누구, 혹은 무엇을 좋아하든 그건 식자 마음이지만, 통제된 우행을 써서 그 사실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거야.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지.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거나 누군가의 호감을 사거나 하는 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가 아니라네.
<보고> 싶으면 스모크한테 안내를 받아야 해.
아들의 죽음.
나도 함께 서 있었지만, 바라보지는 않았네. 눈을 바꿔서 내 아들의 개인적 삶이 해체되어 마치 수정같이 투명한 안개처럼 그 한계를 넘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가는 광경을 <보고> 있었던 거야. 삶과 죽음은 바로 그런 식으로 섞이면서 확산한다네. 내 아들이 죽는 순간 내가 했던 일은 이거야. 누구든 그럴 수밖에 없고, 그게 바로 통제된 우행이라네. <보고>있지 않았다면 아들이 움직임을 멈추는 광경을 바라보았을 테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통곡이 솟구쳐 올라오는 걸 느꼈겠지. 아들의 건강한 몸이 지상을 활보하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실감했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난 그러는 대신 아들의 죽음을 <보는>쪽을 택했고, 그 행위에 슬픔이나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네. 아들의 죽음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과 동등한 것이었거든.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을 경우, 내 통제된 우행은 눈을 바꾸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
통제된 우행은 나 자신, 그리고 같은 인간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하는 행동에만 해당하네.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건 내가 다른 인간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난 내 맹우를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에 맹우를 이해할 수가 없어. 꿰뚫어 <볼> 수 없는 존재를 상대로 어떻게 내 우행을 통제할 수 있겠나? 내 맹우나 메스칼리토를 상대할 때의 나는, <보는> 법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해하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네. 결코 주위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인간이지.
자네를 예로 들어보지. 자네가 식자가 되든 못 되든 내겐 전혀 중요하지 않다네. 하지만 메스칼리토가 그걸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명백해. 중요하지 않다면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가며 자네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난 메스칼리토가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아차리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해왔지만, 그가 그러는 이유가 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네.
#6
식물은 따기 전에 우선 말부터 걸어야 해.
해당 식물을 <보기> 위해서는 직접 말을 나눠야 하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될 필요가 있는 거야. 그럼 식물은 그것에 관해 자네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뭐든지 가르쳐줄 걸세.
주술사가 <보려고> 하는 건 힘을 얻기 위해서야.
만일 내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내 삶 전체는 단지 사적인 혼돈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죽음 말고 인간에게 달리 뭐가 있겠나?
제2부 ‘보기’ 실행
#7
자신의 힘만으로 <보는> 법을 배울 수는 없는 건가요? 저는 진심으로 그걸 터득하고 싶습니다.
<보기>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냐. 순식간에 흘러가는 그 세계를 잠깐만이라도 보기 위해 필요한 민첩성을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건 스모크밖에 없다네. 그게 없다면 자넨 단지 바라보는 수밖에 없을 거야.
순식간에 흘러가는 세계가 뭡니까?
주술사들이 <보는> 세계는 자네가 생각하는 세계와는 달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면서 언뜻 스쳐 지나가는 세계라고나 할까. 자신의 힘만으로도 순식간에 흘러가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다가는 몸이 그 긴장을 못 이겨서 쇠약해지기 때문에 본인에겐 하등 도움이 안 돼. 반면에 스모크를 쓰면 그런 피로에는 전혀 시달리지 않아도 돼. 스모크는 자네에게 세계의 순간적인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민첩성을 부여해주고, 그와 동시에 몸이 축나지 않도록 체력을 고스란히 보존해주거든.
#8
일종의 몽상에 푹 잠긴 상태에서,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하면 나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또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딱히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긴장을 푸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스모크는 문지기를 <보는> 유일한 방법입니까?
아니. 그것 없이도 <볼> 수 있어. 그럴 줄 아는 사람들은 많네. 내가 스모크를 선호하는 건 그쪽이 더 효율적이고 덜 위험하기 때문이야. 만약 스모크의 도움 없이 문지기를 <보려고> 한다면, 제뗴에 몸을 피하지 못할 공산이 커. 자네 경우를 예로 들자면, 문지기가 등을 돌렸을 때 적대적인 색깔을 보여준 건 명백히 자네에게 주는 경고였네. 그런 다음 문지기는 자리를 떴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도 자네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걸 보고 돌진해왔던 거야. 하지만 자넨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약했어. 작은 스모크가 자네에게 필요한 보호막을 제공해줬던 거지. 자네가 그 도움 없이 그 세계로 갔더라면 문지기한테 잡혀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야.
왜요?
자네의 움직임은 너무 느렸을 테니까. 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번개처럼 빨라야 한다네. 방에서 나갔던 건 내 실수지만, 그건 자네가 더 이상 말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야. 자넨 워낙 말이 많아서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경우에조차 말을 하잖나. 내가 함께 있었더라면 자네 머리를 들어줬겠지. 그래도 자넨 자네 힘으로 도약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더 잘 됐다고 해야겠군. 하지만 그런 위험은 무릅쓰지 않는 편이 낫네. 문지기는 섣불리 가지고 놀 수 있는 존재가 아냐.
#9
자넨 너무 약해. 기다려야 할 때는 서두르고, 서둘러야 할 때는 기다리잖나. 게다가 생각이 너무 많아. 지금은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네는 더 이상 스모크를 피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자네의 삶은 너무 느슨해. 작은 스모크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팽팽하지 못하다는 뜻이야. 난 자네를 돌볼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자네가 바보 멍청이처럼 죽는 건 원하지 않네.
그럼 돈 후앙,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이 급해서.
전사처럼 살아야 해! 이미 얘기했듯이 전사는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네. 그 행동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말이야. 자넨 뭔가 생각이 나면 금방 실행에 옮기는데, 그건 잘못된 행동일세. 문지기 건이 실패한 건 바로 그 생각 때문이라는 걸 모르나.
제가 어떻게 실패했다는 겁니까?
모든 것에 대해 생각을 했기 때문이야. 자넨 문지기에 관해 생각을 했고, 그 때문에 그걸 이기지 못했어. 우선 자넨 전사처럼 살아야 하네.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네만.
자네의 삶은 상당히 팽팽해. 사실, 헤나로의 제자인 파블리토나 네스토르보다 더 팽팽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볼> 수 있는데 자네는 그러지를 못해. 자네 삶은 엘리히오보다 더 팽팽하지만 아마 그 아이는 자네보다 먼저 <볼> 수 있을 거야. 난 바로 그 부분이 걸리는 거야. 헤나로조차도 영문을 몰라 하더군. 자넨 내가 한 모든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했어. 난 내 은사가 배움의 첫 단계에서 내게 가르쳐준 모든 걸 자네에게 전수해줬네. 그 규칙은 언제나 올바르고, 그 절차는 절대로 변경될 수 없어. 자네도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행했지만 여전히 못 <보고> 있어. 하지만 헤나로처럼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자네는 마치 <보는> 것처럼 보인다네. 나도 그런 줄 알았다가 속았지. 성공했다 싶으면 자넨 휙 돌아서서 <볼> 줄 모르는 멍청이처럼 행동하곤 했어. 물론 자네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었겠지만 말이야.
“자넨 아직 패배하지 않았어.”
패배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 중 하나라고 돈 후앙은 설명했다. 인간은 승리하거나 패배하기 마련이고, 그 결과에 따라 박해자나 희생자가 된다. 본인이 <보는> 법을 터득하지 않는 한 이 두 조건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그를 옭아매지만, <보기>는 승리나 패배나 괴로움이라는 환상을 타파하게 해준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누군가에게 굴욕당하는 기억을 얻게 될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승리자로 남아 있는 동안에 <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해.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뭘 기다리는지를 아는 상태에서 말이야. 그게 전사의 방식일세. 만약 그게 자네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라면 자네가 그걸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해. 그러면 기다림도 끝날 때가 올 거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자네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될 거야. 그 어린 소년의 삶을 위해 자네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오직 그 소년만이 자네가 한 행위를 무효화할 수 있다네.
하지만 어떻게?
자기 자신의 욕구를 완전히 없애는 방법으로. 그 소년이 자기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한은 그의 인생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일 걸세. 그리고 자네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한은 그 약속의 효력도 지속될 거야.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건 바로 욕망이라네. 하지만 욕망을 완전히 없애는 방법을 터득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더라도 진정한 선물이 되지. 그러니까 평정을 되찾게. 자넨 와칸에게 좋은 선물을 했어. 가난하다거나 결핍되었다는 건 단지 생각에 불과해. 증오도, 허기도, 고통도 마찬가지야.
돈 후앙, 저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허기나 고통이 단지 생각에 불과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나에겐 생각에 불과하다네.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야. 난 그 위업을 이뤘다네. 우리에겐 단지 그러는 능력밖에는 없어. 명심하게. 우리 삶을 관장하는 힘들에 대항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그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티끌이나 다름없고,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에 불과해.
돈 후앙, 당신이 그랬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하지 않지만, 어떻게 저나 어린 와킨처럼 단순한 인간들이 그런 일을 성취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인생을 관장하는 힘들에 대항하는 선택은 오직 본인에게 달려 있네. 지금까지 수십 번, 수백 번 얘기했잖나. 오직 전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전사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으며, 또 뭘 기다리고 있는지를 안다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전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고로 아무리 사소한 걸 얻더라도 모자라지 않고 남아도는 거야. 전사는 먹을 필요가 있으면 그럴 방법을 찾아낼 수 있네.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이지. 전사는 무엇인가가 자기 몸을 아프게 하면 그걸 막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 아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야. 배가 고프거나 고통을 느낀다는 건 스스로를 내던졌고, 더 이상 전사가 아니라는 뜻이야. 그런 자는 배고픔과 고통의 힘에 휩쓸려서 파멸을 맞는다네.
나도 옛날에 맹세를 한 적이 한 번 있네.
일생을 바쳐서라도 아버지를 죽인 놈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아버지 앞에서 맹세했었지. 난 몇십 년 동안이나 그 약속을 마음에 담고 살았다네. 하지만 지금 그 약속은 바뀌었어.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일에 나는 더 이상 관심이 없네. 멕시코인들을 미워하지도 않아.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지. 살아가면서 가로지르는 무수히 많은 길들은 모두 동등하다는 걸 터득했거든. 압제자들도 희생자들도 마지막에 가서는 만나게 되고, 거기서 유일하게 확실한 부분은, 삶이 양쪽 모두에게 너무 짧았다는 사실뿐이야. 오늘 내가 슬픈 건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죽었기 때문이야. 내가 슬픈 건 그들이 인디언이었기 때문이라네. 그들은 인디언처럼 살다가 인디언처럼 죽었다네.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가 없었던 거야.
#10
자넨 전사처럼 행동해야 해.
어떻게요?
그건 말이 아닌 행동으로 터득해야 하네.
전사는 자신의 죽음에 관해 생각한다고 하신 적이 있죠. 저는 언제나 그러고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게 명백해 보이는군요.
.
전사처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걸 낱낱이 설명해주길 바라는구먼. 그렇지?
제 머리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서요.
반드시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어.
이걸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전사처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비는 겁니다. 그걸 안다면 제 쪽에서 그것에 적응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보기> 위한 탐구에 나서기 전에 자네는 그 문지기를 완전히 망각해야만 하네.
어떻게 그런 존재를 망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전사는 자기 의지와 인내심을 써서 망각한다네. 사실, 전사에게는 오로지 의지와 인내심밖에는 없고,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만들어 낼 수 있어.
하지만 저는 전사가 아닙니다.
자넨 주술사의 방식을 이미 배우기 시작했잖아. 이젠 후퇴하거나 후회할 여유 따위는 없어. 단지 전사처럼 살면서 인내심과 의지를 함양할 여유밖에는 없단 말일세. 자네가 그러고 싶든 말든 말이야.
전사는 그것들을 어떻게 함양합니까?
그걸 말로 설명할 방법은 없는 것 같군. 특히 의지에 관해서는 말이야. 의지는 아주 특별한 그 무엇이라네. 의지는 불가사의하게 생겨나거든. 의지를 쓰면 경탄할 만한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 말고는, 그걸 어떻게 쓰는지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없어. 자네가 가장 먼저 명심할 점은 의지를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전사는 그걸 알고, 그것이 오기를 기다린다네. 자네의 문제는, 자네가 스스로의 의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야.
내 은사는 전사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뭘 기다리는지도 안다고 말했네. 자네의 경우에는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아. 여기서 몇 년이나 수행을 했지만, 자기가 뭘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야. 보통 사람이 자기가 뭘 기다리는지를 안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힘든 일이지. 하지만 전사에겐 그런 문제가 없어. 자기 의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아니까 말이야.
이 의지라는 게 정확하게 뭡니까? 결심을 말하는 겁니까? 루시오가 모터사이클을 꼭 가져야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아냐. 그건 의지가 아냐. 루시오는 단지 스스로에게 도취해 있는 것에 불과해. 의지는 그것과는 다르고, 우리의 행동을 지휘할 수 있는 아주 명확하고 강력한 그 무엇이야. 이를테면 객관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질 수 밖에 없는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쓰는 것 같은 거지.
그렇다면 그건 우리가 용기라고 부르는 것 아닙니까.
아냐. 용기는 그것과는 또 달라. 용기 있는 인간이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고귀한 인물이고 늘 숭배자들에게 에워싸여 있지만, 용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네. 용기가 있는 사람이란 보통 위험천만하지만 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을 뜻하네. 대부분의 경우 용기 있는 사람은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 되곤 하지. 반면에 의지는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믿기 힘든 위업과 관련이 있다네.
그럼 의지란 스스로를 통제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일종의 통제하는 힘이라고 해도 되겠지.
그렇다면 제가 원하는 걸 스스로 자제하는 식으로 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냐. 자제심 또한 자기도취이고, 그런 걸 권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네. 자네가 마음껏 질문하도록 놓아두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야. 만약 자네더러 질문하지 말라고 명령한다면, 그러기 위해서 자넨 자기 의지를 왜곡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자기도취 중에서도 자기부정이 제일 안 좋아. 실제로는 자기 내부의 틀에 고정되어버리면서도, 정작 본인은 자신이 아주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어버리니까 말이야. 자네가 질문을 멈추는 건 내가 말하는 그런 의지가 아닐세. 의지는 능력power이야. 능력인 고로 통제되고 조정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한 거야. 난 그걸 알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자네를 대하는 걸세. 나도 자네 또래였을 때는 자네 못지않게 충동적이었어. 하지만 나는 변했어. 우리의 의지는 욕심과는 무관하게 작동한다네. 예를 들자면 자네의 의지는 이미 자네의 틈새를 조금씩 벌리고 있어.
틈새라니요?
우리 내부에는 틈새가 있다네. 갓난애 머리에 있는, 나이를 먹으면 닫히는 말랑말랑한 부분처럼 말이야. 의지를 발달시키면 그 틈새가 열리는 거지.
그 틈새는 어디에 있습니까?
자네의 반짝이는 실들 부근에.
그는 자기 복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어떤 겁니까? 뭘 위한 거죠?
열린 부분이야. 의지는 거길 통해서 화살처럼 튀어나오지.
그럼 의지란 물체입니까? 아니, 물체를 닮은 겁니까?
아냐. 화살 운운한 건 자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에 불과해. 주술사가 의지라고 부르는 건 우리 내부의 힘이라네. 그건 생각이나 물체가 아니고, 소원도 아냐. 질문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머리로 생각하고 원해야 하기 때문에 그건 의지가 아니지. 의지란 머릿속의 생각이 너는 패배했다고 선언할 때 승리할 수 있게 해주는 거라네. 의지란 자네를 불사신으로 만들어주고, 주술사가 견고한 벽을 뚫고 지나가거나 공간을 가로지르게 해주는 거야. 원한다면 달로도 가게 해주지.
돈 후앙은 의지를 인간과 세계를 이어주는 진정한 접점이 되어주는 힘으로 묘사했다. 그러면서도 세계란 우리가 지각하는 그것,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지각하기로 선택하는 그것을 의미한다고 신중하게 강조하기를 잊지 않았다. 돈 후앙은 ‘세계를 지각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간에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을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지각’은 우리의 오감과 우리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럼 의지란 여섯 번째 감각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내가 물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와 지각된 세계 사이의 관계에 더 가깝다고 그는 대답했다.
자네가 의지라고 부르는 건 개인의 성격에서 나오는 강한 기질이지만, 주술사가 의지라고 부르는 건 내부에서 나와서 바깥의 세계에 달라붙는 힘일세. 바로 이 배에서 나와. 반짝이는 실들이 있는 곳에서 말이야.
그는 자기 배꼽 부분을 문질러 그게 정확히 어느 곳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나오다고 말한 건 본인이 실제로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야.
왜 그걸 의지라고 부르는 겁니까?
난 딱히 뭐라고 부르지는 않아. 하지만 내 은사가 그걸 의지라고 불렀고, 다른 식자들도 의지라고 부르거든.
어제는 의지뿐만 아니라 오감을 써서 세계를 지각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보통 인간은 세계 속의 사물을 손이나 눈이나 귀만 써서 ‘파악’할 수 있지만, 주술사는 자기 코나 혀나 의지를 써서 파악할 수 있다네. 특히 의지를 써서 말이야. 말로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어. 하지만 자네도 자네가 어떻게 듣는지를 내게 설명하지는 못하지 않나. 마침 나도 들을 수 있으니까 우리 두 사람은 우리가 듣는 것에 관해 얘기할 수 있지만, 어떻게 듣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얘기할 수가 없어. 주술사는 자기 의지를 써서 세계를 지각한다네. 하지만 그 지각은 청각과는 달라.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거나 그 소리를 들을 때는 바깥세계는 실제로 있고 또 현실적이라는 인상을 받지. 하지만 의지를 써서 세계를 지각할 때는 그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저 밖에’ 있지도 않고, 또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된다네.
그럼 의지는 <보기>와 같은 겁니까?
아니, 의지는 힘이고 주력일세. 그렇지만 <보기>는 힘이 아니고, 사물을 투과하는 방식에 가까워. 아주 강한 의지를 가진 주술사도 못 <보는> 경우가 있다네. 따라서 자기 오감과 의지뿐만 아니라 <보기>를 써서 세계를 지각하는 존재는 식자밖에는 없다는 얘기가 되겠지.
스스로 하는 모든 일을 주의 깊게 관찰하게. 자네 의지의 발달을 도와줄 수 있는 건 자네가 하는 모든 작은 일들 가운데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야.
의지는 개념이 아니네.
내 은사는 위대한 주술사였지만 나나 헤나로가 <보는> 방식으로는 <볼> 수가 없었거든. 나는 내가 <본> 것을 길잡이 삼아 이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네. 반면 내 은사는 전사처럼 살아가야 했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전사처럼 살아갈 필요가 없다네. 그 무엇이 될 필요도 없지. 왜냐하면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면 그만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자네 성격을 감안하건대 자넨 결코 <보는> 법을 터득 못할 가능성도 있어. 그럴 경우 자넨 평생을 전사처럼 살아가야 할걸세.
내 은사는 일단 주술의 길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조금씩 자각하게 된다고 했네. 과거의 일상적인 삶으로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고, 지식을 터득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이며, 일상적 세계의 생활방식은 더 이상 완충제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살아남으려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채택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리고 그 시점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전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건 아주 중요한 절차이자 결정이라고 했네. 지식의 무시무시한 성질 탓에 전사가 되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지.
지식이 무시무시한 것임을 알 무렵에는 죽음이 언제나 내 곁에 앉아 있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동반자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네. 능력으로 변모하는 모든 지식의 핵심에는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죽음이야말로 모든 것에 와 닿는 궁극적인 것이고, 무엇이든 죽음에 닿은 것은 정말로 능력이 되는 거야.
주술의 길들을 따라가는 사람은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즉각적인 파멸의 가능성과 항상 마주치고, 싫어도 스스로의 죽음에 극도로 민감해질 수밖에 없어. 누구든 죽음의 자각 없이는 범용한 행위를 하는 범용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뜻이야. 이승에서의 일상적인 시간을 주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집중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지.
따라서 전사가 되려면 모든 일에 우선해서 스스로의 죽음을 예민하게 의식해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죽음을 걱정하고 있으면 누구든 자기 자신에게만 주의가 고정돼버릴 거고, 그건 심신의 약화로 이어지지. 따라서 전사에게 그다음으로 필요한 건 초연함일세. 임박한 죽음에 대한 생각이 강박관념이 되는 대신 무심함으로 변하는 거지.
이해했나?
이제 자넨 초연해져야 하네.
무엇으로부터요?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져야 해.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는 은둔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은둔자가 된다는 건 자기도취이고, 난 결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닐세. 은둔자는 은둔자가 되려는 욕심에 자기를 내던진 것이기 때문에, 결코 초연해질 수 없어.
오직 죽음에 대한 생각만이 사람을 충분히 초연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는 그 무엇에도 자기를 내던지지 못하네. 오직 죽음에 대한 생각만이 사람을 충분히 초연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는 그 무엇도 거부할 수 없어. 하지만 그런 종류의 인간은 삶과, 삶을 통해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조용한 욕망을 획득하기 때문에 무엇을 갈망하거나 하지는 않네. 자신의 죽음이 살금살금 다가오는 걸 알기 때무에 무엇에 집착할 여유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는 갈망함 없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시도해본다네.
초연해진 사람은 죽음을 멀리하는 일 따위가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의지할 것을 딱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아. 선택의 힘 말이야. 말하자면 자기가 내리는 선택의 지배자가 되는 거야. 그런 사람은 자기가 내리는 선택은 온전히 자기 책임이고, 일단 선택을 하면 더 이상 후회하거나 스스로를 탓할 시간은 없다는 걸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해. 그가 내리는 결정이 최종적인 이유는 단순해. 죽음은 그가 다른 것에 매달릴 시간 따위를 절대로 주지 않기 때문이야.
그런 연유로, 자신의 죽음을 자각함으로써 초연해진 전사는 선택에 대한 지배력을 통해 자기 삶을 전략적으로 관장한다네. 자신은 죽는다는 사실이 그를 인도하여 초연해지게 하고 조용한 욕망을 가지게 만드는 거야. 전사는 자기가 내리는 최종적인 선택의 힘으로 인해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그런 그가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전략적으로 가장 훌륭한 길이라네. 따라서 그는 자신이 해야 하는 모든 일을 열정적이고 활기차게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거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이 전사이며 인내심을 획득했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어!
일단 인내심을 획득하면 전사는 의지를 향한 길을 걷고 있는 걸세. 기다리는 법도 알아. 자신의 죽음과는 친구 사이가 되어서, 돗자리에 앉을 때도 함께 앉지. 죽음은 전사에게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하면 전략적으로 살 수 있는지를 불가해한 방식으로 충고해준다네. 그렇게 해서 전사는 기다리는 거야! 자기 의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니까 전사는 배움에도 조급성을 보이지 않아.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에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을 성취하게 되지. 본인은 스스로의 경탄할 만한 행동을 아예 못 깨달을 수도 있어. 하지만 계속 그렇게 불가능한 일들을 이뤄내거나, 혹은 불가능한 일들이 그에게 계속 일어난다면 그는 일종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거야. 지식의 길을 나아가는 전사의 몸 안에서 나오는 힘이지. 처음에는 배가 근질근질하거나, 뜨겁지만 다스릴 수가 없는 부분이 생긴 듯한 느낌을 받아. 그건 곧 고통이 되고, 엄청난 불쾌감으로 바뀌지. 이런 고통과 불쾌감은 때로는 너무 심한 나머지 몇 달 동안이나 경련이 멈추지 않는 경우조차 있어. 하지만 전사가 겪는 경련은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좋은 징조라네. 크나큰 고통 뒤에는 언제나 훌륭한 능력이 찾아오니까 말이야.
경련이 멎으면 전사는 자신이 주위의 사물에 대해 묘한 감각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네. 배꼽 바로 위나 아래에서 나오는 느낌을 써서 원하는 걸 뭐든지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야. 그 느낌이 바로 의지라네. 그걸 써서 물건을 움켜잡을 수 있게 된다면 전사는 자기 의지를 획득했고, 이제는 자신이 주술사임을 확언할 수 있는 거지.
고통은 필수불가결하지는 않다고 그는 말했다. 이를테면 돈 후앙 본인은 전혀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의지가 그냥 찾아왔다고 했다.
내 은사는 막강한 힘을 지닌 주술사였네.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사였지. 내 은사의 의지는 정말이지 엄청난 위업이었어. 하지만 사람은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도 있다네. <보는> 법을 터득함으로써 말이야. <보는> 법을 터득하면 더 이상 전사처럼 살 필요도 없고, 주술사가 될 필요도 없어. <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무無가 됨으로써 모든 것이 될 수 있거든. 사라지면서도 여전히 존재한다고나 할까. 이렇게 되면 사람은 뭐든지 될 수 있고 원하는 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다른 인간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대신에 우행의 한복판애서 그들을 만난다네. 이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볼> 줄 아는 사내는 자신의 우행을 통제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야. <볼> 줄 아는 사내는 더 이상 다른 인간들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느끼지 않는다네. <보기>를 통해 과거에 알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이미 초연해졌기 때문이지.
우리 인간의 본분은 배우는 거야. 우린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들로 내던져질 운명이라네.
정말로 우리가 갈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남아 있다는 겁니까?
멍청하긴. 우린 아직 아무것도 소진하지 않았어.
<보기>는 완전무결한 사람들을 위해 있는 거야. 자네의 정신을 단련해서 전사가 되고, <보는> 법을 배우게. 그러면 우리가 목표로 삼을 새로운 세계들에는 끝이 없다는 걸 알게 될거야.
#11
정말로 <보는> 경우엔 우리 세계의 낯익은 특징은 어디에도 없다네. 모든 게 새로워지는 거야. 예전에 알건 건 단 하나도 없어. 믿을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지는 거지!
왜 믿을 수 없다는 겁니까? 무엇을 믿을 수 없다는 거죠?
그 무엇도 낯익은 것이 없다는 뜻이야. 자네가 응시하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무로 변한다는 거야! 어제 자넨 나를 <본> 것이 아니었어. 자넨 내 얼굴을 응시했을 뿐이야. 자넨 나를 좋아하니까 내 광채를 느꼈던 거지. 그 문지기처럼 괴물로 보이는 대신 아름답고 흥미롭게 느껴졌겠지. 하지만 자넨 나를 <보지> 않았어. 자네 눈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하지 않았잖아. 그래도 잘 했네. 자넨 <보기>로 이어지는 첫걸음을 내디뎠어. 나에게만 집중한 게 옥의 티였지만 말이야. 그럴 경우에 자네에겐 내가 그 문지기보다 나을 것이 없어. 자넨 양쪽 모두 굴복해버리고 결국 <보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사물이 정말 없어지나요? 어떻게 사물이 ‘무’가 될 수 있습니까?
사물이 없어지지는 않아. 사라진다는 뜻으로 말한 게 아냐.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야.
<보기>는 단지 바라보고 조용히 있는다고 가능해지는 일이 아니라네. <보기>는 배워야 쓸 수 있는 기술이야. 개중엔 처음부터 이미 그 기술을 쓰는 법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보기>란 맹우와 주술사들의 기술과는 독립된 하나의 절차라고 얘기했다. 주술사란 맹우를 부림으로써 자기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그 맹우의 힘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하지만, 맹우를 부린다고 해서 곧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예전에 그가 맹우가 없으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돈 후앙은 매우 침착한 어조로 <볼> 수 있으면서도 맹우를 부리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대답했다. <보기>는 같은 인간에게만 효력을 발휘하는 주술의 조작기술과는 전혀 무관하므로,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였다. 반면에 <보기>의 기술은 인간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했다.
<보기>는 주술이 아냐. <볼> 수 있는 사람은 맹우를 조작하는 법을 삽시간에 배워서 주술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혼동하는 건 쉽지만 말이야.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맹우를 부릴 수 있는 특정 기술을 습득해서 주술사가 되기도 하지만, <보는> 법은 결코 터득하지 못해.
게다가 <보기>는 주술과는 상반되는 거라네. <볼> 수만 있으면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거든.
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까?
모든 게 중요하지 않아.
#12
자네는 문지기를 자네가 알고 있는 무엇으로 간주했어.
자넨 그게 추하다고 느꼈잖나. 엄청나게 크다, 괴물이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자넨 그런 말들이 뭘 뜻하는지 알아. 그래서 문지기는 언제나 자네가 아는 어떤 존재로 나타났고, 그것이 그런 식으로 자네가 아는 존재로 남아 있는 한 자네는 그걸 <볼> 수 없었던 거야. 문지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면서도 자네 앞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에 존재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야 하는 거야.
돈 후앙,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말이 안 되는 소립니다.
말이 안 되지. 하지만 <보기>란 원래 그런 거라네. 말을 써서 그걸 설명할 방법은 없어. 전에도 말했듯이 <보기>는 <보기>를 통해서만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야.
자넨 스스로를 내던졌어. 그것도 의도적으로. 그건 잘못된 행동이야.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다시 한 번 얘기해두겠네. 브루호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전사가 되는 수밖에 없어. 전사는 경의를 가지고 모든 것을 대하고, 필요하지 않은 이상 뭔가를 짓밟지는 않네. 그런데 어제 자네는 경의를 가지고 물을 대하지 않았어. 평상시에는 아주 잘 행동하는데도 말이야. 하지만 어제 자넨 구제불능인 멍청이처럼 죽음에다 자기 자신을 내던졌네. 전사는 그 무엇에도 자신을 내던지지는 않아.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고 해도 말이야. 전사는 무슨 일에든 기꺼이 응하는 동반자도 아니고, 무엇에게든 자발적으로 이용당하는 존재가 아냐. 만약 전사가 어떤 일에 관여한다면, 그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그런다는 점은 확신해도 되네.
전사의 삶이란 전략적인 실천이라네. 자넨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지만, 전사는 의미 따위엔 개의치 않아. 만약 루카스가 전사처럼 살았다면 자기 삶을 전략적으로 관리했을 거야. 그리고 루카스에게는 그럴 기회가 있었어. 그럴 기회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니까 말이야.
내가 자네에게 얘기해줄 수 있는 건, 전사는 결코 순순히 이용당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점이야. 두들겨 맞을 때까지 길가에 멍하게 서있거나 하지는 않는단 말일세. 따라서 그는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날 기회를 최소화한다네. 자네가 사고라고 부르는 건,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멍청이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경우 아주 쉽게 피할 수 있는 것들이라네.
#13
‘티벳 사자의 서’
그 친구들은 왜 그것이 마치 삶인 것처럼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지 모르겠군.
그게 그들의 이해 방식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티벳인들도 <볼> 줄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사람이 <보는> 법을 터득하고 나면 그가 아는 것은 무엇 하나도 힘을 쓰지 못한다네. 그 어떤 것도 말이야. 만약 티벳인들이<볼>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예전과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즉시 간파했을걸. <볼> 줄 아는 사람에겐 더 이상 아는 게 없어. <볼> 줄 모르던 시절에 알던 것들은 단 하나도 그대로 남아 있지 않거든.
혹시 <보기>는 사람에 따라 다 같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이네. 다 같지는 않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우위에 선다는 뜻은 아냐. 일단 <보는> 걸 터득하면, 예전과 같은 건 단 하나도 남지 않아.
티벳인들이 죽음을 삶과 닮은 걸로 간주한다는 점은 명백하군요. 당신은 죽음이 뭘 닮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음은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어. 티벳인들은 뭔가 다른 것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 같군. 하여튼 간에, 그들이 얘기하고 있는 건 죽음이 아냐.
그럼 무슨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자네가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는 사람은 자네지 내가 아니잖나.
아마 티벳인들은 정말로 <본> 건지도 모르지. 그게 사실이라면 그 친구들은 필시 자기들이 <본> 것이 전혀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을 걸세.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책으로 써서 남겼던 거야. 그들 입장에서는 뭘 쓰든 상관없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럴 경우엔 그들이 써서 남긴 그것은 전혀 헛소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티벳인들이 무슨 얘길 하든 저도 크게 상관 안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는 얘기에는 당연히 신경이 안 쓰일 리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죽음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다는 겁니다.
죽음은 소용돌이라네. 죽음은 맹우의 얼굴이고, 지평선 위에서 반짝이는 구름이지. 죽음은 메스칼리토가 자네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이고, 이빨 없는 문지기의 아가리일세. 죽음은 머리로 물구나무를 서는 헤나로이고, 말을 하는 나야. 죽음은 자네와 자네의 그 공책이지. 죽음은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라고! 죽음은 이곳에 있으면서도 아예 없다네.
의료기술로 소생. 죽음은 단지 의식의 단절.
그건 정말로 말이 되네. 죽음에는 두 단계가 있거든. 첫 번째 단계는 의식의 단절이야. 그건 무의미한 단계이고, 메스칼리토를 먹었을 때 처음 오는 효과와 흡사하다네. 그때 사람은 가벼워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기쁨과 완전함과 세상 모든 것이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지. 하지만 그건 얕은 상태에 불과해. 그런 건 곧 사라지고 사람은 새로운 영역으로, 거칠고 힘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돌입하게 돼. 이 두 번째 단계는 메스칼리토와 진짜로 조우할 때와 같아. 죽음도 그것을 아주 닮았지. 첫 번째 단계는 얕은 느낌의 의식 단절 이지만, 두 번째 단계는 본인이 죽음과 만나는 진짜 단계라네. 그건 한순간에 불과해. 처음에는 의식을 잃지만 어떻게인지 몰라도 다시 정신을 차리는 거지. 죽음이 그 조용한 광포성과 힘으로 우리를 박살 내서 우리의 생명을 무無로 분해시켜버리는 건 바로 그때야.
죽음에 관해서 당신은 어떻게 그런 식으로 확연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맹우가 있거든. 작은 스모크는 나의 명백한 죽음을 아주 똑똑히 보여줬다네. 그래서 나는 개인적인 죽음에 관해서 밖에는 얘기할 수가 없다는 거야.
죽음은 언제나 무였던 거야. 무. 그건 자네 공책 갈피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작은 점이었어. 하지만 그건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자네 안으로 들어와서 자네를 확산시킬 거야. 자네를 편평하게 만들어서 하늘과 땅과 그 너머로까지 늘리는 거지. 그럼 자넨 조그만 결정들이 모인 안개 같은 것이 되어서 움직이면서 떠나가는 거야.
죽음은 복부를 통해 들어오네. 의지에 난 틈새를 곧바로 뚫고 들어오는 거지. 그곳은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부위야. 그건 의지의 부위이고, 그걸 통해 우리 모두가 죽는 그런 부위이기도 하지. 내가 그걸 아는 건 내 맹우가 그 단계까지 나를 안내해준 적이 있기 때문이라네. 주술사는 죽음에게 따라잡힘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조정하거든. 주술사가 편평해지고 확산하기 시작하면 그의 완전무결한 의지가 개입해서 안개를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조립해주는 거라네.
주술사를 조립해주는 건 그의 의지야. 하지만 나이를 먹고 몸이 쇠약해지면 그의 의지도 쇠퇴하고, 늦든 빠르든 간에 더 이상 자기 의지를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오네. 그러면 그가 자기 죽음의 소리없는 힘에 저항할 수단은 전무해지고, 그의 목숨은 다른 인간들의 목숨과 다르지 않게 되네. 본 모습을 잃고 자신의 경계 너머로 확산해가는 안개가 되는 거지.
주술사로 산다는 건 엄청난 짐이라네. 그러니까 <보는> 법을 배우는 편이 훨씬 낫다고 얘기했잖나. <볼> 줄 아는 사내는 모든 것이야. 거기 비하면 주술사는 애처로운 존재이지.
돈 후앙, 주술이란 뭡니까?
주술이란 어떤 핵심적인 결합점에다가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는 행위라네. 주술은 간섭이야. 주술사는 영향을 행사하고 싶은 것의 주요 결합점을 찾아내서 거기에다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지. 주술사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볼> 필요는 없어. 자기 의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만 알면 되거든.
#14
주술사는 지식을 향해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그런 힘들의 먹이가 된다네.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균형을 잡을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어. 의지 말일세. 따라서 주술사는 전사처럼 느끼고 행동해야 하는 거야. 다시 한 번 얘기해주겠네. 오직 전사만이 지식의 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주술사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은 전사로서 산다는 사실이 부여해주는 힘이야.
자네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건 나의 의무일세. 개인적으로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자네가 선택받았기 때문이지. 메스칼리토는 내 앞에서 자네를 지목했거든. 하지만 자네에게 전사처럼 느끼고 행동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어하는 건 내 개인적 욕구에서 비롯된 거라네. 전사가 된다는 건 그 무엇보다도 더 적절한 일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믿음이거든. 그래서 나는 이런 힘들을 주술사가 지각하는 방식으로 자네에게 보여주려고 애써왔던 거라네. 왜냐하면 사람은 그런 힘들의 무시무시한 충격을 받아봐야만 비로소 전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 전사가 아닌 상태에서 먼저 <보게> 된다면 자넨 약해질 거야. 그런 경험은 거짓 유순함을, 물러나고 싶은 욕망을 불러온다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그건 결국 육체의 쇠락으로 이어지지. 그래서 나는 자네가 그런 식으로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자네를 전사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거야.
자네가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하는 걸 지금까지 여러 번 들었는데, 난 그런 각오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런 건 아무 쓸모도 없는 자기도취거든. 전사는 단지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또 자네 부모가 자네에게 정신적 상처를 줬다고 말하는 것도 들은 적이 있는데, 인간의 정신이 아주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자네가 해롭다고 간주하는 그런 행위에 의해 상처받는 건 아냐. 난 자네 부모가 자네를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응석받이가 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실제로 자네에게 상처를 줬다고 믿는다네.
전사의 정신은 자기도취나 불평불만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고, 승패에도 연연하지 않아. 전사의 정신은 단지 투쟁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가 벌이는 모든 투쟁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전투라네. 그러니 전사에게 결과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전사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의 정신이 명료하면서도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도록 놓아둔다네. 그렇게 전투를 벌이면서 자기의지의 완전무결함을 자각하고 큰 웃음을 터뜨리는 거지.
이제 자네가 전사에 관해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점을 얘기해주겠네. 전사는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항목들을 선택해야 해.
일전에 맹우를 본 자네를 내가 두 번 씻어줘야 했을 때, 자네의 문제가 뭐였는지 아나?
모릅니다.
자넨 자네의 방패를 잃어버렸던 거라네.
방패라니요?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신 겁니까?
전사는 자신의 세계를 구성할 항목들을 선택한다고 했잖아. 그것도 신중하게 말이야. 왜냐하면 전사가 고르는 항목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가 이용하려고 분투하고 있는 힘들의 맹공격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방패가 되어주기 때문이라네. 이를테면 전사는 방패들을 써서 맹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일반인들 역시 전사와 마찬가지로 그런 불가해한 힘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자신들만의 특별한 방패들로 보호받기 때문에 그걸 아예 감지하지도 못하지.
그 방패라는 게 뭡니까?
사람들이 하는 일.
사람들이 뭘 하는데요?
흠, 주위를 둘러보면 자네도 깨달을 거야. 사람들은 사람이 하는 일들로 바쁘다는 걸. 그것이 그들의 방패가 되어주는 걸세. 주술사의 틈새는 아까 말한 불가해하고 완강한 힘들 중 하나와 마주칠 때마다 벌어지고, 그러면 평소보다 더 죽음 앞에 취약해진다네. 우리가 그런 틈새를 통해 죽는다는 얘기는 했었지. 따라서 틈새가 열리면 그걸 자기 의지로써 메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전사라면 말이야. 만약 자네처럼 전사가 아닌 경우에는 일상생활의 활동을 이용해서 그 같은 조우의 공포로부터 마음을 멀어지게 함으로써 그 틈새가 절로 닫히게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네. 자네가 맹우를 만났던 그날 자넨 나한테 화를 냈었지. 내가 자네 차를 멈추거나 자네를 물에 처박아서 추위에 떨게 만들었을 때 나는 일부러 자네를 화나게 했던 거야. 옷을 입은 채로 젖으니 더 추웠겠지.화가 나고 추웠기 때문에 자넨 틈새를 닫고 안전해질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자네 삶의 이 시점에서는 자넨 더 이상 그런 방패를 보통 사람들만큼 효과적으로 쓰지 못해. 자넨 그런 힘들에 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마침내 전사처럼 느끼고 행동하기 직전의 상태까지 왔으니까 말이야. 자네의 옛날 방패들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게 된 거라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사처럼 행동하고 자네 세계의 항목들을 골라야 해. 이젠 아무거나 되는대로 끌어모아서 주위를 에워쌀 수는 없어. 이건 정말로 심각한 얘기야. 자신이 난생처음으로 옛 생활방식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해.
저의 세계의 항목들을 선택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전사가 그런 불가해하고 완강한 힘들과 마주치는 건, 일부러 그런 것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이야. 그래서 언제나 그런 만남에 대비되어 있지. 반면에 자네는 전혀 그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실제로 그런 힘들이 찾아오면 자네는 소스라치게 놀랄 게 뻔해. 그 공포는 자네의 틈새를 열 거고, 자네 목숨은 불가항력적으로 거길 통해 빠져나가게 될 거야. 그러니까 자네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대비태세를 갖추는 거야. 언제든 맹우가 눈앞에 불쑥 튀어나올 수 있다고 상정하고 그럴 경우에 대비하는 거지. 맹우를 만난다는 건 애들 장난이 아니고, 전사는 자신의 목숨을 지킬 책임이 있어. 그러다가 그런 힘들 중 하나가 자네를 건드려서 자네의 틈새를 연다면, 자넨 스스로 그걸 닫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에게 큰 평화와 기쁨을 주는 일들을 몇 가지 골라둬야 한다네. 공포로부터 마음을 돌리게 해서 자네의 틈새를 닫고 자네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들을 말이야.
이를테면 어떤 걸 얘기하시는 겁니까?
몇 년 전에 전사는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깃든 길을 택해서 따라 간다고 자네에게 말해준 적이 있지. 전사가 일반인과 다른 건 언제나 마음이 깃든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라네. 자신이 선택한 길과 하나가 될 때, 또 그 길을 따라가면서 크나큰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때 전사는 그것이 마음이 깃든 길임을 깨닫는 거지.
하지만 방금 저는 전사가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마음이 깃든 길을 선택할 수 있죠?
지금이 전환점이야. 예전에는 정말로 전사처럼 살 필요가 없었다고 해두지.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어. 이제 자네 마음이 깃든 길의 항목들로 자신을 에워싸고, 나머지는 거부해야만 하네. 안 그러면 다음에 맹우와 마주친다면 자넨 파멸이야. 첨언하자면, 자넨 더 이상 맹우와의 만남을 일부러 요청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맹우는 자네가 자고 있을 때 올 수 도 있고, 친구들과 대화하는 중에도 올 수 있고, 글을 쓰는 중에도 올 수 있거든.
몇 년 동안 줄곧 당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려고 진심으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던 건 분명해 보이는군요. 그런데 지금 와서 어떻게 더 잘할 수 있겠습니까?
자넨 생각과 말이 너무 많아.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짓을 멈춰야 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딱히 자네만 그런다는 건 아냐. 우린 모두가 늘 속으로 독백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잘 생각해보게. 혼자 있을 때 자넨 뭘 하나?
자신과 얘기합니다.
자기 자신과 무슨 얘기를 하는데?
글쎄요. 그때그때 생각나는 거라면 뭐든 얘기할 수 있겠죠.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지를 가르쳐주지. 우린 우리의 세계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네. 사실, 우리는 그런 식의 내적 독백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를 유지시켜가는 거야.
어떻게요?
자신에게 얘기하기를 그칠 때마다 세계는 언제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네. 우리가 그것을 새롭게 하고, 거기에 생명의 불을 붙이고, 내적 독백으로써 그것을 지탱하는 거지. 그뿐 아니라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얘기를 하는 동안에 자신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죽는 날까지 계속 똑같은 선택을 되풀이하는 거야. 왜냐하면 우린 죽는 날까지 계속 똑같은 마음속의 독백을 되풀이하거든.
전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고로 그 얘기를 멈추기 위해 노력한다네. 자네가 전사처럼 살고 싶다면 반드시 알아야 할 마지막 사항이야.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에게 얘기하기를 멈출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우선 귀를 써서 눈의 부담을 좀 덜어줘야 해. 우리는 태어난 이래로 줄곧 눈을 써서 세계를 판단해왔어.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하는 얘기도 주로 우리가 본 것에 관한 것이고, 전사는 그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에 세계에 귀를 기울인다네.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거지.
전사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을 멈추는 즉시 세계가 변화할 것임을 알고 있네. 그리고 그 엄청난 충격에 대비하고 있어야만 하지.
돈 후앙,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세계가 이렇고 그런 것은 단지 세계가 모름지기 그런 식이라고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세계란 그렇다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기를 그만두면 세계도 그렇게 존재하기를 멈추지. 지금으로선 자네가 그런 경천동지할 충격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으니, 자넨 우선 천천히 세계를 풀어헤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해.
무슨 얘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자네의 문제는 세계와 인간이 하는 일을 혼동한다는 점이야. 이 역시 자네 혼자만 그러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지. 인간이 하는 일들은 우리를 둘러싼 힘들을 막아주는 방패라네. 우리가 인간으로서 하는 일은 우리에게 위안과 안심감을 주거든. 그러니 인간이 하는 일은 중요해. 그것이 방패라서 중요한 것일 뿐이지만 말이야. 우린 자신이 인간으로서 하는 일들이 방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꿈에도 깨닫지 못한 채 그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거라네. 사실, 인류 입장에서는 인간이 하는 일 쪽이 세계 그 자체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
무엇을 두고 세계라고 하시는 겁니까?
세계란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들이라네.
생명, 죽음, 인간, 맹우들, 그리고 우리를 에워싼 그 밖의 모든 것들 말이야, 세계는 이해가 불가능해. 우리는 결코 그걸 이해할 수 없을 걸세. 세계는 결코 그 비밀을 드러내지 않을 거야. 그러니 우리는 그걸 있는 그대로 대해야만 하네. 순수한 신비로서 말이야!
하지만 범부는 그러지 않지. 그런 사람에게 세계란 결코 신비가 아니고, 늙으면 더 이상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다고 그가 믿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야. 노인은 세계를 다 산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일들을 다 한 것일 뿐이네. 그런데도 그는 멍청한 혼란에 빠져서 자신에게 세계는 더 이상 신비롭지 않다고 믿어버리는 거지. 기껏 방패를 얻을 목적으로 그런 비참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니!
전사는 이런 혼란을 자각하고 사물을 적절하게 다루는 법을 터득한다네. 그 어떤 조건하에서도 인간이 하는 일이 세계 자체보다 중요할 수는 없어. 따라서 전사는 세계를 끝없는 신비로 대하고 인간이 하는 일을 끝없는 우행으로 간주하는 거라네.
#15
온몸에 묘한 느낌이 끓어오르면서 ‘힘power’이 밖으로 새나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이 비전을 지우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 뇌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마음이 깃든 길’의 항목들이 방패가 되어준다는 돈 후앙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내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흥미진진한 열정의 대상, 나를 크나큰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주는 일이. 나는 맹우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맹우의 얼굴 전체가 보이기 전에 아무 문제 없이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주술사에게는 모든 것이 의미를 갖고 있어. 소리에는 구멍이 나있고, 자네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야. 보통 사람들은 그런 구멍들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못 내기 때문에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그냥 살아가야 해. 벌레든 새든 나무든 간에 살아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얘기를 해줄 수 있다네. 우리의 속도가 그들의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을 만큼 빠르기만 하다면 말이야. 스모크는 우리가 그런 속도를 낼 수 있게 해준다네. 하지만 우리는 이 세계에 사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해. 그래서 곧 죽이려고 하는 식물에게 말을 걸어, 잘라서 미안하다고 빌어야 하는 거라네. 우리가 사냥할 동물들 역시 마찬가지야. 반드시 필요한 것들만 잡아야 하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가 죽인 식물과 동물과 벌레들이 우리를 적대시해서 질병과 불운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지. 전사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최대한 달래주려고 한다네. 그래야지 구멍을 통해 볼 때 나무와 새와 벌레들이 진실한 얘기를 해주거든.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자네가 맹우를 봤다는 사실이야. 그게 자네가 할 일이야! 우리가 뭔가를 사냥하러 갈 거라는 얘긴 했지. 난 그게 동물일 거라고 생각했네. 자네가 동물을 목격하고, 그걸 함께 사냥해야 할 거라고 말이야. 내 경우는 멧돼지를 보았지. 내 점령 포획기도 멧돼지야.
그 정령 포획기를 멧돼지로 만들었다는 겁니까?
아냐! 주술사의 삶에서는 그 어떤 것도 그것 아닌 다른 무엇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아. ‘어떤 것’이 있다면 그건 그것 자체일 뿐이라네. 자네가 멧돼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내 정령 포획기도 멧돼지라는 것을 깨달았을 거야.
우리는 왜 사냥을 하러 여기에 온 겁니까?
맹우가 자기 자루에서 꺼낸 정령 포획기를 보여줬으니까. 그를 불러내려면 자네도 그런 것이 하나 있어야 해.
정령 포획기가 뭡니까?
끈이야. 그걸 쓰면 나는 다른 맹우들이나 나 자신의 맹우를 불러낼 수 있고, 물웅덩이의 정령들, 강의 정령들, 산의 정령들도 불러낼 수 있다네. 내 것은 멧돼지이고 멧돼지처럼 울어. 자네를 돕기 위해서 자네 주위에서 두 번 그걸 써서 물의 정령을 불러냈지. 그 정령도 오늘 맹우가 왔을 때처럼 자네에게 왔었지. 자넨 충분한 속도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걸 못 봤지만. 하지만 협곡으로 자네를 데려가서 바위 위에 눕게 했던 날 자네는 정령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어도 정령이 자네를 위에서 거의 덮치다시피 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런 정령들은 조력가라네. 다루기 힘들고 좀 위험하긴 하지만 말이야. 그것들을 누르려면 완전무결한 의지가 있어야 해.
#16
선물을 줄 수 있는 종류의 정령. 진정한 맹우이며 비밀을 가르쳐주는 존재이다.
이 특수한 종류는 외지고 인적이 없는, 거의 접근이 불가능한 장소에 존재한다고 한다. 그런 존재를 찾아내고 싶은 사람은 먼 곳까지 직접 여행해야 하며, 외진 곳에 도착한 뒤에는 혼자서 모든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있다가 예의 그림자를 목격하면 즉각 그 자리를 떠나야 하지만, 그 이외의 상황과 마주칠 경우에는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모닥불을 꺼버리고, 다시 불을 붙이려는 시도를 네 번 잇달아 방해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상황에 해당한다. 근처에 있는 나무에서 가지가 부러지는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단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러졌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돈 후앙은 말했다.
그밖에는 바위가 굴러오거나 모닥불을 향해 자갈이 날아오는 경우, 혹은 어떤 식으로든 지속적인 소움이 들려오는 상황에 유념할 필요가 있었다. 그럴 경우에는 정령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런 현상이 일어난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 존재가 전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소름 끼치는 모습을 하고 느닷없이 그의 앞으로 튀어나오거나, 뒤에서 그를 꽉 껴안고 몇 시간 동안이나 그 자리에 못 박아둘 때도 있다고 했다. 전사 위로 나무를 쓰러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돈 후앙은 그런 존재는 정말로 위험한 힘이며, 직접적인 수단을 써서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지만 공포로 죽게 하거나, 사람 위로 실제로 어떤 물건이 떨어지게 하거나, 사람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 발을 헛디디게 함으로써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만약 내가 부적절한 상황에서 그런 존재와 마주쳤다가 저항하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내 영혼을 앗아갈 수조차 있기 때문에 단지 지면에 몸을 던진 채 아침까지 참는 수밖에 없다고 돈 후앙은 강조했다.
비밀을 가르쳐주는 존재인 맹우와 대면하는 사람은 모든 용기를 쥐어짜서 맹우 쪽에서 자신을 부여잡기 전에 먼저 부여잡고, 맹우 쪽에서 쫓아오기 전에 먼저 쫓아가야 하네. 쫓아갈 때는 가차 없이 쫓아가야 하고, 그런 다음 대결하는 거지. 맹우를 부여잡고 땅에 쓰러뜨린 다음 그쪽에서 자네에게 능력을 선사해줄 때까지 꼼짝도 못하게 붙들고 있는 거야.
당연히 실제를 갖고 있지.
그것들과 씨름할 때는 단단한 느낌이 오거든. 하지만 그런 느낌은 순간적이야. 그 존재들은 인간의 공포에 의존한다네. 따라서 씨름 상대가 전사라면 그 존재는 금세 압력을 잃어버리고 전사는 되려 활력을 얻게 되지. 전사는 정령의 압력을 실제로 흡수할 수 있다는 뜻이야.
어떤 종류의 압력을 말하는 겁니까?
능력. 그것을 만지면 마치 당장에라도 이쪽을 갈가리 찢어놓을 것처럼 격렬하게 진동하지만 그건 쇼에 불과해. 사람이 계속 부여잡고 있으면 그것은 압력을 잃어버린다네.
압력을 잃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공기 같아지는 건가요?
아니. 그냥 축 늘어져. 여전히 실체는 남아 있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건 그 어떤 감촉과도 다른 느낌이야.
원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방법은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낯설고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돈 후앙이 나에게, 나는 늘 일의 시작부터 알아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버릇이 있다고 지적했던 것이 생각났다. 시작 따위는 애당초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산속에서 마침내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다. 출발점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17
자네의 마음은 단지 일의 한쪽 면만 찾아보도록 고정되어 있어.
그는 지면에 여덟 개의 점을 찍었다. 그런 다음 첫 번째 점을 원으로 에워쌌다.
자넨 여기 있어. 우리들 모두가 여기 있지. 이건 감정이고, 우리는 여기서 여기로 움직이네.
그는 첫 번째 점 바로 위에 있는 점을 원으로 에워쌌다. 그런 다음 이 두 점 사이로 잔가지를 왕복시키며 왕래가 빈번함을 묘사했다.
하지만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점은 여섯 개가 더 있다네. 대다수의 인간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지만 말이야.
돈 후앙은 첫 번째 점과 두 번째 점 사이를 잔가지로 쿡쿡 찔렀다.
이 두 점 사이를 움직이는 걸 자네는 이해라고 부르네. 지금까지 자네가 살아오면서 줄곧 해왔던 일이지. 자네가 내 지식을 이해한다고 말하더라도 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는 뜻이야.
그런 다음 그는 여덟 개의 점의 일부와 다른 점들을 선으로 이었다. 그 결과 대칭적이지 않은 선들로 이어진 여덟 개의 중심을 가진 길쭉한 사다리꼴이 만들어졌다.
나머지 여섯 개의 점들은 각각 하나의 세계라네. 감정과 이해가 자네에게 두 개의 세계인 것처럼 말이야.
왜 여덟 개밖에 없는 겁니까? 원의 경우처럼 무한한 수가 있을 수가 있지 않습니끼?
내 지식이 미치는 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점은 여덟 개밖에 없다네. 아마 인간은 그 너머로는 못 가는 건지도 몰라. 그리고 난 지금 이해하는 게 아니라 다룬다고 했네. 그 점을 명심했나?
자네 문제는 모든 걸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이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자네가 끝끝내 이해하기를 고집한다면 자넨 인간으로서의 운명 전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얘기가 되네. 장애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지. 따라서 자넨 몇 년을 거의 허송세월한 거나 마찬가지야. 완전한 잠에서 깨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어차피 다른 상황을 통해서도 성취할 수 있었던 일이니까 말이야.
자넨 사슬에 묶여 있어!
자네 이성의 사슬에 묶여 있는 거야.
이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네. 이해는 작은 부분에 불과해. 그것도 극히 사소한.
그는 사람은 오로지 행동을 통해서만 주술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게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일을 완전히 그만둘 작정이라고 말했다.
자네는 나아가는 방향을 바꿔야 해. 그럼으로써 자네를 묶고 있는 사슬을 끊으란 말일세.
돈 후앙은 자신이나 돈 헤나로의 행동에서 이해할 것은 전무하며, 주술사라면 경탄할 만한 이적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헤나로하고 나는 여기서 행동하네.
그는 이렇게 말하며 그가 그린 도표의 중심 하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여긴 이해의 중심이 아냐. 그래도 자넨 이게 뭔지를 알아.
#에필로그
자네가 돌아오든 말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는 전사처럼 살아갈 필요가 있네. 자네도 줄곧 알고는 있었겠지만, 이제는 지금까지 무시해왔던 걸 활용하는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했어. 그렇지만 자네는 이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해. 그건 그냥 주어지는 것도, 건네 받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자기 내부에서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자넨 아직도 빛을 발하는 존재에 불과해.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죽어야 한다는 얘기야. 예전에 빛나는 달걀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를 자네에게 한 적이 있지.
자네 안에서 정말로 변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